거리마다 이팝나무 흰 꽃이 환하다.
이팝나무가 피면 늘 이곳에 가고 싶어진다.
1547년에 조성되었다 하니 약 500년 된 이팝나무가 있는 광양읍 유당공원.
어린시절의 이곳은 동네 친구 미경이와 형옥이랑 즐겨 가던 놀이터였다.
그때의 유당공원에는 활터가 있었다.
활터를 관리하던 집 딸인 숙자는 동창이자 친구여서 우리가 공원에 놀러가면 같이 놀았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랑 오빠랑 사는 숙자는 착한 친구였다.
지역의 유지들로 보이던, 꽤 잘 나가는 분들이 모여서 활을 쏘았다.
동심원이 여러 개 그려져있는 사각형 모양의 나무로 된 과녁이 100미터 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허리춤에 맨 화살통의 화살을 따 쏘면 숙자 오빠가 자전거를 타고 가서 화살을 수거해왔다.
큰 오빠가 하다가 작은 오빠가 이어서 하곤 했다.
화살터는 오래 전에 철거되고 없다.
화살에 한 쪽 눈을 다친 숙자의 작은 오빠를 비롯, 숙자네 가족도 오래전에 이사를 갔다.
지금은 어느 곳에 살고 있을까?
유당공원에는 나무가 많다.
오래된 팽나무, 벚나무가 주변을 감싸고 있고, 공원의 면적도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게 넓어졌다.
그럼에도 해마나 내가 찾는 나무는 이팝나무이다.
천연기념물 235호로 지정된 이팝나무.
이리 큰 고목을 다른 곳에서 본 적이 별로 없다.
보릿고개 넘기기가 힘들던 시절,
그리하여 고리를 줌에도 장리쌀을 내지 않을 수 없던 시절,
오죽하면 나무에 핀 흰 꽃이 쌀밥처럼 보였을까?
1547년 광양현감 박세후에 의해 만들어진 유당공원은 팽나무, 이팝나무와 함께 수양버들이 많이 심어져 '유당공원'(버들못)이라는 이름은 얻게 되었다.
유당공원은 조성 당시 마을의 허한 부분(칠성리의 당산이 호랑이가 엎드린 형국이고, 읍내리는 학이 날으는 형국으로 남쪽이 허함)을 보호하려고 늪에 연못을 파고 수양버들과 이팝나무 등을 심은 비보림 성격의 전통 마을숲이었다.
당시에는 동남쪽에서 불어오는 소금기 실은 바람과 바닷물에 되쏘이는 햇빛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였으며,
동초등학교와 서초등학교에서 터미널 로터리와 유당공원 구간에 조성된 숲거리는 왜구로부터 광양읍설을 은폐시켜 주는 기능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이팝나무는 1971년 9월 13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고, 2007년 9월 13일에는 유당공원 26주와 광양읍 인서리 숲 40주가 추가되면서 문화재 명칭이 '광양읍수와 이팝나무'로 변경 지정되었다.
이팝나무는 입하 무렵 초록빛 새순 위에 흰 쌀밥을 뿌려 놓은 것처럼 하얀꽃이 피어 입하목 혹은 쌀밥나무라 불리었고 꽃피는 모습으로 그해 벼농사의 풍흉을 짐작했다고 한다. (위 사진 표지판에서)
2015년에 갔을 때만 해도 사진 속 뭉툭 잘린 오른쪽 가지에 긴 잔가지가 있었고,
그 끝까지 이팝나무 흰 꽃이 피었었는데...
누가 자른것일까?
아님 태풍 등으로 저절로 부러진 것일까....
불과 5년 사이에 영 볼품없게 되어 버렸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지도 50년이 되었으니,
사람도 나무도 인간관계도 세월 속에 장사 없나보다.
노랑어리연이 꽃 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정자도 보수공사중이었다.
지난 번에는 없던 안내판이 보였다.
줄줄이 늘어선 공적비 앞에 이 표지판이 붙은 곳은 두 곳이다
일제 국권침탈 협력자 이근호
이근호(1861~1923) 서울 태생으로 을사오적 이근택의 형이다. 1902년 제5대 전라남도 관찰사 겸 전라남도 재판소 판사를 지낸 결과 '관찰사이공근호청덕애민비'가 건립되었지만 2007년 발간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에 기록된 그의 친일 행적은 다음과 같다.
1906년 한일 양국의 친교 증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서보장'을 받음
1908년 유림을 회유하기 위해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으로 조직된 '대동학회' 회원으로 활동함.
1910년 <조선귀족령>에 의거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의 직위를 받음.
1911년 한국합병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2만 5천원(약 9억원 정도)의 은사공채를 받음.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일제 국권침탈 협력자 이근호'의 죄상을 밝히고
역사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이 안내문을 세운다.
2020. 4
광양시장.
뜻하지 않게 역사 공부를 하게 되었다.
공적비를 없애지 않고 그대로 두고 안내문을 세운 게 잘했다는 생각이다.
나쁜 역사도 우리의 역사이다.
반면교사로 삼을 수가 있으니까...
오른쪽 비석은 일제 국권 침탈자 조예석
조예석(1861~?) 서울 태생으로 1902년 전라남도 관찰부 광양군수로 부임하면서 '행군수조후예석흘민선정비'가 건립되었지만 2009년 민족문화재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된 그의 친일 행적은 다음과 같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다.
각각의 비석 앞에는 세월이 흘러 마모된 부분이 많기도 하고 한자 세대가 아닌 후대를 위하여
한글로 쓰여진 안내문이 친절하게 붙어있다.
광양시가 참 잘했다고 생각된다.
이팝나무 피걸랑 광양 유당공원으로 가 볼 일이다.
나이가 많은 이팝나무 할머니가 반겨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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