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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

저는 남자고, 페미니스트입니다/최승범/생각의 힘

 

 책을 읽었다.

서점에서 내가 골라서는 절대로 읽지 않았을 페미니즘 도서다.

선생님 한 분이 1박2일 아이들 체험학습 인솔할 때 읽으려고 가져온 책인데

그 선생님보다 내가 먼저 읽게 되었다.

평소 즐겨 읽던 장르가 아니었지만 의외로 느끼는 바가 많았다.

직장여성이고, 세 아이를 키우는 동안 집안일을 거의 하지 않는 남편과 살고 있고,

명절과 제사가 되면 학교를 조퇴맞고 와서 제사 준비를 해야 하는 나는

딸아이로부터


"왜 그렇게 바보같이 사느냐?"

"엄마 혼자 집안일을 하는 건 부당하다."

"고모들은 다 노는데 직장다니면서 아이도 셋이라 할머니 살 방도 없는데 우리 집으로 할머니를 모셔 오는건 아닌 것 같다. 직장에서 퇴직해서 시간도 많고 방도 많은 고모들이 모시는 게 옳지 않느냐?"

"제사라는 이유로 바쁜 엄마가 제사 음식을 다 만드는 게 말이 되냐? 과감히 줄여야 하지 않은가?"

"명절이면 한 끼 정도 사서 먹으면 될 일을 몇 시간의 전 부치는 일을 하느냐? 여자만 이러고 있는 건 부당하다."

등의 수많은 원성을 들으며 살아왔다.


"그냥 내가 이틀 쯤 힘들면 여러 사람이 행복할 것인데 뭘 그리 따지고 그래? 나중에 너나 잘하세요"

"엄마처럼 그럴까 봐서 시집 안 갈래요."

덕분에 우리 집 두 딸은 자칭 '비혼주의자'다.

나는 남녀 성차별 하지 않는 평등주의자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비교적 잘 실천하고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며 살아왔다는 걸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도 의식하지도 못하는 채 얼마나 많은 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내 속에 숨어있었는지를 깨우쳐 주는 책이었다.


고등학교 교사 9년째

국어선생님.

이제 막 결혼하여 뱃속에 아이와 아내를 가진 선생님(글 읽는 내내 아는 이 분이 양성애자거나, 아님 동성애자가 아닐까 생각했다. ㅎㅎㅎㅎ)

글은 국어선생님 답게(이 말도 모순이리라.ㅎㅎ) 아주 맛깔스럽고

적절한 비유로 나처럼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은 부분이 많은 독자들이 반성하며 읽기 좋게 쓰여졌다.

수업시간에 맥락을 잡아서 어떻게 양성평등교육을 실천하는 지도 예를 들어 잘 설명되어 있었다.

 




 

 

 

 

아픈 남편 간호하는 아내는 많아도, 아픈 아내 간병하는 남편은 드물다.

남성 암 환자는 97퍼센트 아내의 간병을 받지만, 여성 암 환자를 간호하는 남편은 28퍼센트에 불과하다.

간병만 안 하면 양반이다.

여성 암 환자의 이혼율은 남편 암 환자의 네 배다.(본문에서)

 대학에서 일어나는 성범죄는 가해자 네 명 중 한 명이 교수다.

피해자는 열 명 중 여덟 명이 학생이다.

학생에 비해 교수가 소수인 걸 감안하면 교수 가해자 비율이 무척 높은 편이다.

다시 말해 성범죄는 권력 관계에서 일어나는 범죄다.

실수였다는 말, 충동적으로 저질렀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술에 취해 사장 빰을 때리는 사원은 없고, 이사장의 딸을 더듬거리는 교장은 없다.

그런데도 여성에게 조심할 것을 당부하고 책임을 묻는다.

 세계경제포럼에서 해마다 발표하는 성격차지수에서 한국은 2016년 기준 144개국 중 116위를 차지했다.

2015년 115위, 2014년 117위, 2013년 111위로 줄곧 하위권을 지키고 있다.

성격차지수는 경제, 교육, 건강, 정치 네 분야에서 같은 국가 남성을 기준점으로 삼아 여성의 위치를 가늠한다.(본문에서)



 누구나 약자의 자리에 놓일 때가 있다.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보다 상대적 강자이지만 자본가 앞에서는 무력해진다.

대학에서 교수는 갑 중의 갑이지만 교수 사회에서는 출신 대학으로 차별받는다.

1차 하청업체는 2차 하청 업체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지만 원청 대기업 앞에서는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한국에서 남성-비장애인-이성애자-자본가로 살면 무엇 나나 부족함이 없을 것 같지만

미국에 가면 '엘로 몽키'에 불과할 수 있다.(본문에서)



 

 

 

원고를 쓰면서 세 명의 여성을 여러 차례 떠올렸다. 어머니와 짝꿍과 딸이다.나는 어머니의 삶을 통해 페미니즘을 배웠다. 열 달 동안 그녀에게 기생했고, 수십 년째 돌봄을 받고 있다. 내가 태어난뒤로 어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잃고 '승범이 엄마'로 살아왔다. 평생동안 자신을 불살라 가정을 지탱해 온 조은희 님을 보며 내가 가부장제의 수해자이자 가해자로, 또한 그 이데올로기의 공모자로 복무해왔음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내년이면 욱십갑자를 한 바퀴 돈다. 코르셋 벗기에 딱 좋은 나이다. 아들이 열정적으로 도울 것이다.


페미니즘을 알게 된 뒤로 '결혼은 남자한테나 좋지 여자에게는 무조건 손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나였다. 짝꿍은 주변 사람들에게 페미니스트 남편을 만나서 행복하겠다는 말을 듣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기에 늘 고맙고 미안하다. 말과 글과 삶이 일치하는 반려자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무엇보다 그녀가 김혜영의 이름으로 사는 데 가족이 굴레가 되는 일은 없게 할 것이다.


책 쓰는 일이 이렇게 힘든 줄 미처 몰랐다. 분수를 몰랐다고 자주 후회했지만 곧 태어날 딸을 생각하며 기운을 냈다. 핑크와 리본에 가두지 않고, 성 중립적인 환경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이 아이가 여자라서 꿈을 꺾지 않고, 여자라서 참지 않으며, 여자라서 자기를 단속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존엄한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이 책이 아주 작은 기여라고 할 수 있기를 바란다.(본문 마지막 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