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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

다시 읽는 명작 <빨간 머리 앤>

 소휴당 오는 길에 아무도 봐 주지 않는 구석 자리에 국화가 핀 걸 보았다.

슬쩍~~~ 두 가지를 꺾어서 커피잔에 꽂았다.

꽃 한 송이에 혼자 행복해졌다.(늘 그렇듯이 옆지기는 작업복 입고 밖에서 일하고 있는 중)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빨간 머리 앤 책 표지와도 아주 잘 어울리는 색이네. ㅋㅋ


어제까지 가을을 만끽하기 참 좋은 날씨였는데 오늘은 꽤 쌀쌀했다.

한 달 전부터 새로 시작한 퇴근 이후 수영 배우기,

토요일에는 나주까지 가서 4시간 수업 듣기 등으로 무리한 탓인지

지난 주말 안과와 이비인후과 두 군데 병원을 들를 정도로 컨디션이 안 좋았다.


눈에 안약을 넣고 기다리기 뭣하여 머리맡에 있는 이 책을 들었는데 너무 재밌었다.

결국 시린 눈을 비벼가며 그 날 밤에 118쪽까지 읽었었다.

내가 이미 읽었다고 생각했던 <빨간 머리 앤>은 그 줄거리만을 아는 것 뿐이었다.

주근깨 빼빼마른 빨간 머리 앤, 이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워~~

노래나 만화를 통해 아는 빨간 머리 앤은 알고 있었던 건 아닌지....


지난 주 내내 읽던 이 책을 오늘 소휴당에서 다 읽어버렸다.

500쪽이 넘는 긴 소설책을 간만에 읽었다.

방학이면 장편 대서사를 찾아읽던 적도 많았는데, 이젠 눈도 아프고 방학이면 놀러다니기 바빠

장편이 엄두가 안난다.


머리는 빨갛고 빼빼마른 데다 끝간데 없이 혼자서도 말하고 주변 사람에게도 말하는 수다쟁이 고아 앤이

캐나다 프린드 에드워드 섬에 사는 과묵한 남자 매슈와

겉으론 무뚝뚝하나 속정 깊은 마릴라에게도 입양되어 와서

초록지붕 아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가만히 귀 기울이며 앤이 하는 수다를 듣다 보면

누구라도 이 사랑스런 아이를 무한정으로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마약에 빠지는 듯 하다.

그 톡톡튀는 매력이 책을 뚫고 내게도 전해져와서 책을 놓기가 아쉬웠다.

군데 군데 앤의 눈을 통해 묘사되는 에드워드 섬의 풍경도 너무나 아름답다.

캐나다 이 섬에 놀러가고 싶어졌다.

이 소설책을 쓴 루시 모드 몽고메리(1874~1942)가 바로 이 섬 출신이다.


255쪽


앤은 하얗게 서리가 내린 멋진 겨울 아침에 집으로 돌아왔다. 한숨도 자지 못해 눈꺼풀은 무거웠지만, 길게 뻗은 하얀 들판을 가로 질러 연인의 오솔길에서 아름답게 반짝이는 단풍나무  아치 밑을 걸으며, 앤은 매슈에게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아, 매슈 아저씨, 정말 아름다운 아침이죠? 하느님 스스로 즐기시려고 상상해서 만든 세상 같아요, 안 그래요? 저 나무들은 제가 '후!'하고 불면 날아가 버릴 것 같아요. 하얀 서리가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 정말 기뻐요, 그렇죠? 그리고 해먼드 아주머니가 쌍둥이를 세 번씩이나 낳은 것도 결국엔 잘된 일이었어요. 안 그랬으면 저도 미니 메이에게 어떻게 해 줘야 할지 몰랐을 테니까요. 쌍둥이 때문에 헤먼드 아주머니께 짜증 부렸던 게 정말 미안해요. 아, 매슈 아저씨, 너무 졸려요. 학교에 못 가겠어요.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해 바보 같을 거예요 허지만 집에 있는 건 싫어요. 길버....아니 다른 아이들이 일등을 차지하면 다시 따라잡기가 너무 힘들거든요. 물론 힘들면 힘들수록 따라잡았을 때의 만족감도 더 크겠지만요. 그렇죠?"


앤은 이웃에 사는 다이애나와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되지만 앤은 실수로 다이애나에게 쥬스를 준다는 게

그만 포도주를 주게 된다.

취한 다이애나를 본 다이애나의 엄마는 더이상 앤과 놀지 못하게 한다.

 그로 인해 보고싶어도 모르는 사이처럼 지내는데 어느 밤 다이애나가 다급한 목소리로 앤 집에 찾아온다.

위 장면은 아파서 위기에 처한 다이애나의 동생(미니 메이)을

어린 나이에 쌍둥이가 셋이나 있는 집에서 아이 돌보미로 지낸 경험이 있는 앤이

기지를 발휘하여 목숨을 구한 후 집으로 돌아오면서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되어주는 매슈 아저씨와 나눈 대화이다.

아니 대화라기 보다는 일방적인 앤의 수다이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상상력 풍부하고 영혼이 맑응 이 아이에게 전염되는 듯한

마력이 있는 대화법이다.



천방지축 사고뭉치였던 앤은 초록지붕 집에 온 지 4년만에

매슈와 마릴라가 너무나 사랑하는, 없어서는 안 될 가족이 되고

말 많은 동네사람들과 학교에서도 인정받는 똑똑한 아이로 성장한다.

그리하여 집을 떠나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되지만

뜻하지 않는 매슈의 죽음과 혼자 남은데다 시력을 잃어가는 마릴라를 두고 갈 수 없어서

고향 학교에서 교사로 남게 된다.



앤은 고독 속에서 눈물을 흘리길 바랐다. 그렇게 사랑하고 그렇게 사랑해 주던 매슈를 위해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는다는 건 앤에게는 끔찍한 일이었다. 어제 저녁 석양 속을 함께 걷던 매슈가 이제 어둑한 아래층 방에서 무서우리만치 평온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창가에 무릎 꿇고 앉아 언덕 너머 별을 올려다보며 기도할 때조차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날의 고통과 흥분으로 기진맥진해 쓰러져 잠들 때까지도 그저 계속 이어지던 지독하고 묵직한 아픔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잠에서 깨어나지 사방은 여전히 조용하고 어두웠다. 그날의 기억이 슬픔의 파도가 되어 밀려왔다. 매슈가 "우리 아이, 내가 자랑스러워하는 우리 앤"이라고 하던 목소리도 들렸다. 그러자 눈물이 솟아났고 앤은 가슴이 터지도록 울기 시작했다. 마릴라가 그 소리를 듣고는 앤을 달래러 들어왔다.


"자....., 자......,그렇게 울지 마라, 앤. 그런다고 아저씨가 돌아오지는 않아. 울어 봤자.....소용이없어. 그걸 알면서도 나도 아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지만, 오라버진 나한테 항상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단다. 하지만 이것도 다 하느님의 뜻이겠지."


앤이 흐느끼며 말했다.
"아, 그냥 울게내버려 두세요, 아주머니. 가슴 아픈 것보단 우는 게 더 나아요. 잠시만 곁에서 절 안아 주세요. 다이애가 아무리 착하고 다정하고 친절해도 함께 있을 수는 없었어요. 이건 다이애나의 슬픔이 아니니까요. 슬픔 속에 있지 않으니 제 마음을 온전히 느낄 수가 없잖아요. 이건 아주머니와 저, 우리 두 사람의 슬픔이에요. 아, 아주머니, 아저씨 없이 어떻게 살죠?"


"우리에겐 서로가 있잖이, 앤. 네가 없었으면.....네가 이 집에 오지 않았으면 어쨌을지 모르겠구나. 앤, 그동안 내가 너한테 엄하고 모질게 대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오라버니만큼 널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젠 너한테 말하고 싶어, 내가 워낙 속마음을 잘 얘기 못하는 성격이긴 하다만 이런 일이 닥치고 보니 말하기가 오히려 편하구나. 앤, 난 널 친자식처럼 사랑했단다. 네가 초록 지붕 집에 온 뒤부터 너는 내 기쁨이자 위안이었어."






그들이 입양하려 했던 건 실은 남자 아이였음에도

기차역에서 기다리는 못 생긴 여자 아이의 호소를 차마 외면하지 못해

앤을 입양하고 감싸안은 이후 매 순간 말없는 지지와 사랑을 아낌없는 베풀어준 매슈의 죽음 앞에서는

나 역시 눈물이 줄줄 흘렀다.


명작이 주는 감동은 이래서 좋은 것이다.

책 읽는 것으로 주말을 다 허비했지만 뭐 어떠랴?

밥 먹는 일만큼 배부른 게 바로 책 읽는 일인 걸.

가을엔 역시 책 읽기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