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생활 30년 넘게 해 오다 오니 이런 저런 인연으로 엮일 일이 많다.
휴대폰을 바꾸면 간혹 이런 질문을 받는다
"영업 하시나 봐요?"
천 오백개가 넘는 전화번호를 내려받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바람에 듣는 말이다.
한 번 맺은 인연을 잘 끊지 못하여 거둬내지를 못한다.
오래 전 담임하던 아이들 번호, 학부모 번호, 학교 옮길 때마다 만나는 동료교사들 번호....
그리하여 내 전화번호부에는 011전번도 많다. ㅎㅎ
물건도 마찬가지라서 잘 버리지를 못한다.
인간관계에서도 좀 맘에 안 들어도 그동안 들인 공이 아까워서 참고 이어가는 편이다.
이건 때론 치명적인 독이 되는 것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한다.
기록하지 않으면 흘러가는 일상이 아까워서 시작한 블러그에서도 마찬가지다.
온기없는 인터넷 공간이지만 글을 통해 그 사람이 보일 때가 있다(글도 때론 거짓말을 하지만).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생각하는 바가 나랑 닮은 사람,
내가 사는 모습과 비슷한 사람,
정갈하고 맑은 마음 여린 사람 등 응원해주고 싶고, 새 글 올라오면 반가운 사람이 있다.
특별하고 귀한 선물을 받았다.
그것도 내가 사는 곳에서는 멀고도 먼 강원도 화천에서 온 선물이다.
이렇게 큰 상자 가득 풋고추가 들어있었다.
센스있게 고명으로 쓰라고 붉은 고추도 몇 개 있다.
화천이라니?
오래 전 화천 화진포 해수욕장에서 무려 4박을 한 적이 있다.
아이들 어렸을 적 백사장에 텐트를 치고 4박을 했는데 화진포 해수욕장이 특별히 좋아서라기 보다는
텐트 걷어서 이사가기 싫다는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먹을 게 떨어지면 인근 시장에 가서 장을 봐 왔고
하늘의 별을 보며 잠이 들고,
저녁이 되면 각설이가 약 파는 구경을 했다.
아참 노래자랑이 열렸는데 구경에 그치지 않고 노래도 불렀었구나,
화천 아줌마의 선물로 화천의 기억이 줄줄이 소환당하는 중 ㅎㅎ
그러고는 지금껏 화천을 가 본적이 없었는데 화천로고가 찍힌 선물이 배달되어 온 것이다.
블러그의 글을 보고 보내달라는 게 있어 작은 성의를 베풀었을 뿐인데
보내는 것의 수십배 뻥튀기가 되어 이렇게 큰 선물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이것도 인연인데 집에서 키우는 고추나 좀 보내드릴테니, 주소 알려주세요"
뜻밖의 이야기에 냉큼
"네~~~" 하고 대답한 것이 잘못을 아니겠지? ㅎㅎ
양이 많아서 직원 모두가 나눴다.
누구는 엑기스에 짱 박아두면 맛좋은 장아찌가 된다고도 했고,
누구는 새송이 버섯과 볶아 먹으면 아삭아삭 맛있다고 한다.
이렇게 맺어진 특별한 인연이 신기하다.
인연이야 스치는 모두가 해당이 되겠으나, 또 이런 인연은 처음이라 신기하고 재밌다.
그 분은 호박과 고추 농사를 주로 짓는 산골 아줌마.
나 역시 주말이면 약간의 텃밭 농사를 짓기에 이 한 박스가 채워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땀방울과 수고로움이 담겼을지 짐작이 간다.
"잘 먹겠습니다"
아낌없이 나눠주는 그 분의 마음이 고맙다.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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