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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풍경/생태수도 순천

순천 낙안 뿌리깊은 나무 박물관


순천시 낙안면에 뿌리깊은 나무 박물관이 있다.

나무 뿌리를 전시한 박물관 이냐고요?

No, No~~~


이곳은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고자 애쓰고

잡지 <뿌리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의 창간자 고 한창기 님의

유물로 만들어진 박물관이다.

벌교초-순천중-광주고-서울대 법대를 나온 지식인 한창기님은

자신이 생전에 모은 유물 6.500점을 순천시에 기증하였고

그 유품을 모아 이 박물관을 만들었다.


어느 블러그에는 그가 순천시 출생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른 잘못된 정보.

한때 벌교는 낙안군 벌교읍이었던 적이 있었으나,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그는 보성군 벌교읍 고읍리 지곡마을 출신.

 (보성군에는 보성읍과 벌교읍으로 읍이 두 개가 있다.

두 읍의 거리는 승용차로도 30분이 넘게 걸려 지역민의 정서나 문화가 사뭇 다르다.)


현재 벌교읍 징광리에 위치한  <징광옹기>와 <징광차밭>은

한창기 씨의 동생 (고)한상훈씨가 1980년대부터 조성하였으며

징광옹기는 기존의 장독대에 놓던 항아리 중심에서

밥상위에 올라오는 생활자기로의 변화된 모습으로 전국에서도

유명한 옹기로 자리잡고 있다.





 

박물관은 낙안읍성과 담벼락을 마주하고 있다.

낙안읍성을 일 년에 몇 차례씩 오가면서 정작 이곳은 처음으로 가 보았다.

한창기님의 유물로 이루어진 박물관이라면서

왜 이름에서는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지...안타깝다.

그는 후손 한 명 남기지 않은 채 97년 지병으로 61살의

조금은 아쉬운 나이에 사망했다.


 듣기로 원래는 그의 고향인 보성군에 터까지 내놓고 유물을 기증하려 했으나

보성에서 거절했다고.

하여 인근 순천시에 기증했다고 전해진다.

어디나 리더의 역할이 중요.

인문학적 소양이 없는 리더는 이런 데 돈 쓰는 걸 아까워한다.

다리를 놓거나 도로를 포장하거나 눈에 보이는 사업에 돈을 쓴다.

태백산맥과 꼬막을 연결지어 남도답사 1번지로 도약하고자 하는

보성군 벌교읍의 현재로 봐서는 무척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박물관 외부나 내부나 정갈하고 아름다운 박물관이다.

한 사람의 노력이 이룬 성취를 보는 기쁨이 컸다.



 이 연꽃무늬 수막새는 고구려 것이라 했다.

남도 땅에서 고구려 문화의 자취를 보다니....


 오리모양 토기가 귀엽다.

한창기 선생이 맨 처음 관심을 보인 영역이 토기라 한다.

오리 모양 토기는 원래 어느 대학 교수가 가지고 있던 건데

한창기 옹이 급 관심을 보이자 기증해 주었다 한다.


 

 

 코끼리 모양의 화로.

앙증맞은 코끼리의 모습에 마음을 빼앗겨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문제는 너무 작아서 화로로서의 기능성은 좀 떨어지지 않을까....


 빨래 줄에 걸린 여기저기 실밥 터진 나이키 운동화까지 도둑맞던 시절.

미국 것이라면 무조건 좋고

우리 것이라면 무조건 촌스럽고...

그런 시절에 우리 문화에 눈 돌리고,

잡지를 발간하여 국민의 의식을 계도하고자 했던 선구자.


 

 한창기님의 또 다른 업적의 하나.

우리 것, 그 중에서도 판소리의 소리꾼에게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라 한다.

당시 소리꾼들은 예인으로서의 제대로의 평가를 받지 못한 채

시장터에서나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서울대 정병욱 교수와 함께 그 분들의 대우하고

자료를 정리하고 녹음하고 그 분들의 가치로움을 세상에 알렸다 한다.


 한창기 님은 70년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한국지사인 브리태니커 회사를 설립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현대적인 세일즈 기법을 도입하여 마케팅을 한 창시자라 한다.

당시 피아노 한 대의 가격이 8만원일 때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18만원이었다.

한글도 아닌 영어로 된 브리태니커 사전을 불티나게 팔렸고

부와 지성의 대명사로 서재 한 가운데 자리했다 하니

그는 사람들의 허영심까지 꿰뚫어 본 사람이었을까나?


 

 한 쪽에서 마침 특별전시로 "조선 문무백관의 복식"전이 열리고 있었다.



 

 

가슴에 학이 두마리가 있는 이 옷은 문관 당상관이 입던 옷.

학이 한 마리면 당하관이 입던 옷이라 한다.


 

조선시대 조복이다.

조복은 조선시대 문무백관이 아침 일찍 임금께 문안을 드리고 정사를 아뢰는 조회 때

입었던 옷이다.

또 나라의 경사스러운 날이나 조칙을 반포할 때도 착용했다.

조복은 지배 계층이 전유물로서 조복을 입었다는 것은 가문의 영광으로 여길만큼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소매가 비교적 좁은 이 옷은 활동하기 편한 옷이다.



 흥선대원군의 초상화에서도 볼 수 있는 이 옷은 <학창의>라고 한다.

예로부터 신선이 입는 옷이라 하여 덕망높은 학자가 평상복으로 입었다.

이는 학창의가 학과 같이 고결하고 숭고함을 상징하는 옷이라 생각했기 때문.

소매가 넓고 옆선과 뒷솔기가 트인 게 특징이다.


어떻게 보관했는지 의복의 보관상태나 색깔, 모습등이 아주 훌륭했다.

한 쪽에는 실발과 호패 등의 유물로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 바로 앞에는 1922년 구례읍에 지어진 김무규 선생의 한옥을 2006년 이곳에 옮겨 건축한 한옥이 있다.

뒤로 낙안면의 명산 금전산이 보인다.


참으로 아름다운 가을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