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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

일곱번째 봄/K보리 지음/두란노/2017년

 


지난 6월에 읽었던 남궁인씨의 <차라리 재미라도 없든가>는 본인이 읽었던,

혹은 읽고 있는 책이나 본 영화, 등을 소개하는 책이다.

책을 소개하는 책.

거기에 소개된 책 중의 한 권이 바로 <일곱번째 봄>이다.



이 책의 저자인 K보리를 전혀 몰랐다. 이 책은 어느 날 택배로 날아와 내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k보리의 자필 편지와 함께였다. 내용인즉슨 우연히 라디오에서 내 책이 낭독되는 것을 들었고, 감명을 받아 자기가 쓴 책을 선물한다는 것이었다. 저자로서 감동적인 내용이었다. 하지만 편지의 글씨체가 기묘하게 조악했고, 거침없이 빨간 펜으로 교정이 되어 있는 것이 뭔가 좋지 않는 느낌을 주었다. 흔하게 저자에게 선물을 보내는 사람인가도 생각했다. 하지만 책을 펼쳐들자마자 나는 그 편지와 내가 받은 선물에 대해 곱절 이상의 감동을 느꼈다.


저자인 K보리는 스티븐 존슨 신드롬 환자다. 드문 병이라서 일반인은 잘 모르겠지만, 이 병은 대학병원 피부과에서 최악의 질병으로 꼽힌다. 궁금하신 분들은 인터넷에서 사진을 잠깐 뒤지면 알 수 있다. 다형성 홍반이 형성되면서 전신이 마치 화상을 입은 것처럼 변한다. 이 과정에서 환자의 피부는 거의 사라지고 진물이 흐르며, 당사자에게는 가만히 누워 있지도 못하는 고통을, 보는 사람에게는 놀라움과 끔찍함을 안겨준다. 점막 부분도 침범되어 환자의 눈과 입, 항문에 염증이 생겨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만들고, 수술을 반복하게 만든다. 이 과정에서 사망 확률도 높다.


남궁인, 책만 읽어보아도 이 분이 얼마나 박학다식한 지 알 수 있다.

한국소설 뿐 아니라 외국소설,

게다가 그 소설과 작가에 대해 거의 비평가 수준의 멘트를 달고 있다.

피아노 실력도 수준급이다.

한 사람이 이렇게 많은 재주를 가진 것에 대해 질투하며 책을 읽다가

책 속에 소개되는 K보리의 삶이 궁금하여 이 책을 산 것이다.


 

 


238쪽

몸이 열 냥이면 눈은 아홉 냥이라고 한다. 살아가면서 시각적인 부분을 배제한다는 것은 열에 아홉을 잃는 것처럼 큰 타격이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마 6:22~23)



엄마도 여자다. 누구의 엄마로 불리기 이전에, 한 사람의 아내이기 이전에 엄마에게도 꽃피던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으리라. 나이에 상관없이 곱게 화장을 하고, 예쁜 옷과 보석에 욕심이 생기고, 언제나 여왕벌처럼 대접 받고 싶은 여자 말이다. 처음 방병했을 때 우리 엄마가 쉰일곱이었는데 이제는 환갑을 지나 예순이 훌쩍 넘으셨다. 처음 조카가 생겼을 때는 할머니라는 호칭이 우리 엄마는 너무 늙어 보이게 하는 것 같아 싫었는데 지금은 내가 아파서 엄마를 더 폭삭 늙어 버리게 만들었다. 잃어버린 나의 청춘보다 잃어비린 엄마의 시간을 돌려주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쉰일곱의 엄마를 다시 만나고 싶다. 그러나 이전이든 지금이든 진짜 엄마가 보고 싶다. 진짜 우리 엄마가.


286쪽

긴 투병의 고통과 외로움을 잘 견딜 수 있었던 비법 중 하나는 내게 주어진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었다. 나는 내 삶을 크게 두가지로 나눈다. 발병 이전의 삶이 1막이었다면 발병 이후는 2막의 1장이고, 2012년 8월 23일 간증한 날을 기점으로 눈이 크게 불편해진 날부터가 2막 2장이 되었다. 그리고 2막부터의 삶은 하나님이 내게 보너스로 주신 선물이라고 여기면서 살아왔다. 그렇기에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마음가짐으로 주어진 하루에 최선을 다했다.


288쪽

나의 두 번째 비법은 나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매일같이 스스로에게 최면을 거는 것이다. 길고 긴 고통와 굴욕의 시간 동안 이 법은 상당히 큰 효력을 발휘했다. 투병 생활이 시작된 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는 것을 몹시 꺼렸다. 아무렇지 않게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너무도 당연하게 멀쩡한 두 눈으로 같은 곳을 응시하는 그들을 볼 때마다 걷잡을 수 없는 괴리감으로 내 마음은 피폐해졌다.


그때마다 조용히 주문을 외웠다.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1퍼센트의 VIP다" 그러고 나면 답답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어쩌면 이 병이 발병했을 때부터 나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이다. 스티븐 존슨 중후군. 이 병에 걸릴 확률은 만 분의 일이라고 했다. 내 머리로는 가늠할 수도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289쪽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큰 집과 좋은 차, 겉치레 학위가 전부일까? 우리는 흔히 행복하면 감사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감사한 마음을 먼저 가져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 인간의 무한한 욕심은 끝도 없기 때문이다. 행복은 대단한 것에 있지 않다. 아무 때나 빨래가 하고 싶을 때 세탁기를 작동시키는 것이고, 가슴이 답답할 때 운동화를 꺼내 신고 무작정 달리는 것, 뜨거운 햇살 아래서 얼음이 가득 담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길을 걷는 것, 냉장고에 계란이 똑 떨어졌을 때 슬리퍼를 질질 끌고 동네 슈퍼를 기웃거리는 것, 저녁 사워를 마치고 폭신한 침대에 대자로 누워 자는 것, 이 외에도 나의 일상 속에서의 사소한 행복은 너무나 많다.



작가 K보리는 만 분의 일의 확률로 걸린다는 희귀병에 걸려 상상할 수도 없는 투병의 과정을 거친다.

읽어주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친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세밀한 투병의 과정은 끔찍하다.

그 과정을 어떻게 견뎠을까 싶은 정도로 인내의 시간을 거친 후에도 어느 날은 눈이,

어느 날은 귀가 안 들게 된다.

손톱 마저도 다 빠져 유일하게 남은 손톱이 하나밖에 없을 정도이다.


그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

한 방을 쓰는 언니의 살뜰한 간호,

오빠와 새언니 그리고 어린 조카들의 사랑 속에서 힘을 얻어 나간다.

손톱이 빠진 그 손으로 기타를 배우고,

귀가 들리지 않는 고통 속에서도 영어를 익히려고 노력한다.

 또 틈틈이 글을 쓰고,

블러그를 운영하고 그 글을 출판사로 보내 책으로 펴내기에 이른다.


극한 상황에 빠진 인간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그 과정은 눈물겹다.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K보리씨의 인생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