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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

잘가요 엄마/김주영 장편소설/문학동네/2012초판, 2017년 인쇄본

 

 

 

1939년 김주영 작가가 태어났으니 올해로 여든 살이 된 노작가의 2012년 작품이다.


"글 쓰는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감성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글은 글쓴이의 자서전이고 자신에게는 반성문"이라는 김주영 작가


방학이 되면 장편소설을 읽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를 키우는 그 수선스런 시절에도 아이들이 모두 잠들고 내일 늦잠을 자도 괜찮은 깊어가는 밤이면

긴 장편소설의 바다에 빠져 행복했었다.

그렇게 읽은 책이 박경리 작가의 토지(모두 16권, 두 말 하면 잔소리, 박경리 작가의 열정에 존경을)

태백산맥(10권), 아리랑(12권, 2권까지가 참 지루했다),

한강(10권, 술술 넘어가는 소설책)

그리고 김성종 작가의 여명의 눈동자(10권, 최재성과 채시라 주연의 드라마가 얼마나 잘 만들어진 드라마인가를 확인했다. 소설은 드라마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

최명희 작가의 혼불(10권, 갈수록 재미있어서 소설이 끝날 무렵 아껴서 읽었던 기억, 오래된 우리 전통과 맛깔스런 전라도 말이 인상적이었던 작품, 작가의 죽음으로 이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던 게 너무나 아쉬웠던 작품) 

어느 방학 때는 귀신 잡는 퇴마록에 람세스 일대기, 이문열의 삼국지까지.

꽤나 장편을 읽었었다.

그럼에도 마음의 부채처럼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면서도 읽지 못한 책이 

바로 김주영 작가의 <객주>이다.

보부상의 이야기를 장터를 배경으로 풀어낸 이야기.

이상하게 김주영 작가의 책은 많이 읽지 못했다.


오지 중의 오지, 청송 출신의 이 작가가 오래도록 가슴에 묻어둔 엄마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냈다.

소설이라는 게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허구의 이야기가 가미되기도 하지만

작가는 이 소설에서의 엄마이야기는 100% 진실이라고 이야기한다.

가슴에 묻어두고 일흔이 넘어서야 풀어낸다는 건 그만큼의 부끄러움과 상처가 많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소설을 쓰고서야 작가는 비로소 진정으로 엄마를 떠나 보낼 수 있지 않았을까....

혼자 짐작해본다.


모든 글은 글쓴이의 자서전이라는 위의 작가의 말도 있지만 결국 작가는

자신이 경험하였거나 들었거나 혹은 읽었거나 주변의 이야기가 밑바탕되어 글을 쓸 수 밖에 없다.

작가가 엄마 이야기를 이렇게 오래도록 망설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소설은 처참한 가난 속에서 한 소년이 어떻게 성장해 가는지,

엄마와의 애증을 어떻게 쌓아가는지 보여주고 있다.

읽는 내내 어린 소년의 외로움과 막막함이 감정이입되어 슬펐다.


그럼에도 지금 내가 옮겨 적는 것은 노작가의 살아있는 감성이 빚어낸 아름다운 명문장이다. 깊어가는 밤의 풍경을 이다지도 세밀히 묘사할 수 있는 작가의 능력이 놀랍다.


209쪽

그 순간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태와는 밤중에 만나 밤중에 헤어지곤 했는데 누나가 어떻게 그 비밀까지 알고 있는 것일까. 나와 정태만 알고 있는 비밀. 우리는 밤의 영혼들과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쥐동나무 울타리에서 들리는 참새들이 날개 파닥이는 소리, 행주로 훔쳐낸 듯 말끔하게 벗져지던 여명의 하늘, 그런가 하면 초저녁의 잿빛으로 죽어가는 듯한 우중충한 하늘, 진한 자줏빛으로 물들어가던 동녘 하늘, 별이 총총한 밤하늘, 밤 숲속에 얼기설기 비껴 있는 달그림자, 오솔길 뒤에서 피어올라 들판 멀리로 가만가만 피어오르는 방안개, 밤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담벼락에 그리는 기하학적이고 괴기한 그림자, 멀리서 개 짖는 소리, 그리고 바람에 떠밀린 판자 울타리들의 삐걱거리는 소리들, 밤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들의 울음소리, 그 바람을 타고 흐르는 밤의 꽃냄새들, 돌담 아래로 떠밀려가는 낙엽들의 건조한 목소리, 가로수 가지 위에 걸터앉아 흔들리고 있는 조각달, 밤빛 속으로 꼬리를 늘어뜨리며 희미하게 그려지는 밭둑길, 그 밭둑길을 따라 피어 있는 하얀 메밀꽃들, 젖먹이 울음소리 같아 들려올 적마다 소름끼치는 도둑괭이의 울음소리, 하늘 끝자락을 따라 우쭐거리며 춤을 추는 듯한 산주름, 그 모든 것들이 우리들에게는 숨쉬거나 말하고 있는 듯한 밤의 영혼들이었다.


265쪽

"무슨 대꾸가 그리 밋밋하냐?"

"글쎄요. 달리 할 말이 없어서요. 나를 키운 것은 뭐랄까....분노와 술뿐이었다는 말이 맞을 것 같네요."


그 순간 누나는 정색을 하고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분노와 술? 너 안색을 보니 무슨 뜻인지 대강은 알겠다만.......어린 시절의 기억이란 것이 마치 칼날과 같아서 혀를 베일 수도 있다. 눈 나라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늑대는 잡을 때, 칼날에 짐승의 피를 묻힌 다음 그 칼을 짐승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거꾸로 세워놓는단다. 밤중에 늑대가 지나다가 피 묵은 칼을 발견하고 다가가서 밤새도록 칼날을 핥다가 나중엔 제 피를 모두 소진하고 죽게 된다는 얘기를 들었다.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그럴싸한 애기가 아니냐. 너가 어린 나리에 집 나가서 겪은 고통과 상처를 아직까지 가슴속에 넣고 다닌다면, 너가 바라볼 수 있는 세상의 넓이도 고통과 상처뿐인 게다......너가 가출해서 겪은 갖가기 우여곡절을 구구절절이 가슴속에 넣고 다니게 되며, 늘어나는 것은 포원뿐이다. 분노와 술뿐이었다는 말은 지금까지 누굴 사랑해볼 적이 없다는 말과 다르지 않구나. 사랑할 줄 모근다면 출세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자. 가슴속에 응어리진 결기를 죽여라, 너 관상을 보자니 나이 육십이 넘도록 그 무거운 것을 고스란히 가슴속에 담고 있구나. 그런 미련한 놈이 어디 있느냐.....너도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나처럼 나이를 먹게 되면 한 가지 좋은 것이 있는데....부질없는 것에 매달리지 않게 된다는 것이야."


오지 중의 오지 청송에 폐교를 리모델링하여 만든 <객주 문학관>이 있다고 한다.

언젠가 그 곳을 지난 적이 있다. 달기 약수던가? 그 옆집에서 초록빛이 나는 약수를 넣어 만든 백숙만 먹고 왔는데......객주 문학관을 꼭 들러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