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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이근후 작/갤리온

이근후(이화여자대학교 명예교수)


1950년대 고등학교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혼자 모든 걸 해결해야 했던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대학 시절 4.19와 5.16 반대 시위에 참가해 감옥 생활을 한 덕분에 한동안 취직이 어려워 생활이 힘들었던 적도 많앗다. 취직 후에도 빚을 갚고 자식 넷을 낳아 키우느라 젊은 시절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쉽게 절망하는 법이 없었다. 몇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살아 있는 것 그 자체가 감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화여자대학교 교수이자 정신과 전문의로 50년간 환자를 돌보고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76세의 나이에 고려사이버대학 문화학과를 최고령으로 수석 졸업하면서 세간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은퇴 후에 다시 학생이 되어 배움의 길에 들어선 그는 그저 웃으며 '일흔 넘어 한 공부가 가장 재미있었다'라고 말할 뿐이다. 30년 넘게 네팔 의료 봉사를 하고, 40여 년 넘게 광명보육원 아이들을 돌본 이유도 별게 없다. 봉사를 하니까 인생이 더 즐거워졌다는 게 이유의 전부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몸 상태를 알고 나면 깜짝 놀란다. 그는 10년 전 왼쪽 눈의 시력을 완전히 잃고, 당뇨, 고혈압, 통풍, 허리디스크 등 일곱 가지 병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그럼에도 그는 퇴임 후 아내와 함께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를 설립하여 청소년 성 상담, 부보 교육, 노년을 위한 생애 준비 교육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또한 그는 한 여자의 남편이자 네 아이의 아버지로 살아오면서 절대 자식 인생에 간섭하는 부모는 되지 말아야지 마음먹었더랬다. 현재 그는 결혼한 자녀 부부와 네 명의 손자 손녀까지 모두 삼 대 열세 명이 한집에 모여 사는 대가족을 이루고 있는데, 그 화목함의 비결은 딱 하나다.

각기 독특한 개성을 지닌 식구 전체가 행복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시아버지로서 며느리에게 거절하는 법무터 가르칠 정도로 상호 불간섭주의와 독립성 보장을 지켜오고 있다. 그랬더니 오히려 가족 간 허물없는 소통이 이루어졌다며 즐거워한다.....


누구나 즐겁게 재미있게 인생을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진짜로 인생을 즐기는 사람은 재미있는 일을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어도 재미있게 해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 순간순간이 쌓여 진짜 재미있는 삶을 만든다. 그래서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말한다.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것이므로 나이 드는 것을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그래고 좀 두렵더라도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겠다'는 다짐을 잃지 말라고, 그것만으로도 인생은 훨씬 풍요로울 수 있다고...


앞 뒤 책 날개에 적힌 글만 적었는데도 한 참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이 날개에 바로 이 책을 관통하는 모든 주제가 들어있다. 요새 에세이 집을 자주 읽는다. 그 중 이 책은 압권이다. 소설이 아닌 에세이 집을 잠을 안 자고 읽어본 건 처음이다. 너무 괜찮은 책이다. 노년을 살아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삶의 여유과 그 분이 지닌 철학이 맘에 든다. 본받으며 살고 싶다.


6쪽

재미를 추구한 덕에 노년이 된 지금, 나는 심심하지 않게 잘 살고 있다. 요즘 가장 재미있는 일을 꼽으라면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 컴퓨터를 이용해 정신과에 관한 교육과 상담은 물론, 한 사이트에는 아동기 감정을 이해시키기 위한 자료로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매일 올린다. 보는 사람도 재미있다 하지만 정작 제일 재미있어 하는 사람은 바로 나다. 또 컴퓨터로 젊은이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눈다. 그 외에도 집에서 한 시간 떨어진 북악스카이웨이 천천히 걸어서 다녀오기, 30년 동안 의료 봉사를 해 온 네팔 1년에 한 번 방문하기, 한 달에 한 번 시 낭송 모임, 40년 동안 봉사해 온 보육원에 들러 아이들과 놀아 주기, 주말마다 네 자녀 가족돠 돌아가며 저녁 식사하기, 보고 싶은 사람 불쑥 방문하기 등, 지금도 재미있응 리들이 많다.


18쪽

그러므로 좋은 것이 늘 좋으리란 법은 없으며 나쁜 것이 언제나 나쁜 것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느 한쪽만 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보는 것이다. 단점이 있다면 노력을 기울여 보완하고, 장점은 갈고 닦아 내 삶에 힘이 되도록 해야 한다. 좋은 기운을 북돋아 나쁜 기운을 잠재우도록 해야 한다.


 23쪽

나는 기적이라는 말을 믿습니다. 그 기적은 자신의 한계르 극복하며 간절히 원하고 기도하는 자에게만 허락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겸허해야 하며, 절대 욕심부리지 말아야 하며, 더러는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엄홍길, <괜찮아, 살아 있으니까> 중에서


30쪽

노후 대비로 젊었을 때 보험이나 연금을 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외로움에 대비하는 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다른 말로 '적응'이다. 살다 보면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시기가 꼭 온다. 그 상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에 적응하는 법은 스스로 찾아내야 한다. 경제적 준비를 잘해서 연금이 많이 나온다 해도, 그 연금을 쓸 능력이 없으면 그것 또한 고통이다. 단지 저축을 많이 하고 돈 쓰는 법을 배우라는 말이 아니다. 외로움은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외로움을 없애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을 너무 거창하고 형이상학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랑은 궁금증과 관심에서 시작한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궁금증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사랑이다.


67쪽

어쩌면 '나이 듦'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나 혼자 이룬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그때 그 일이 내가 잘해서 성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시간의 강물을 따라 하나하나 드러나는 것이다.


74쪽

언론 인터뷰 때 꼭 받는 질문이 '좌우명이 뭐냐, 삶의 철학은 무엇이냐'는 것들이다. 평생 마음이 아픈 환자들을 진찰하고, 학생들을 가르쳐 온 노학자에게 무언가 삶의 특별한 비결이 있을 거라 새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철학은 정장 입은 상식'이라는 말이 있듯, 밥 먹고 일하고 공부하는 일상의 상식이 철학이다. 그런 점에서 특별히 내세울 만한 삶의 철학은 없다. 그래도 굳이 묻는다면 나의 답은 언제나 같다. "차선으로 살자" 그러면 상대는 좀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을 되묻는다. 세상은 최선을 다해 살라고 하는데 왜 당신은 차선으로 사느냐고.


나는 '최선'이라는 말이 싫다. 최선을 내가 가진 100을 다 쓰라는 말이다. 그러면 씨앗을 먹어 치운 농부처럼 내일을 기약할 수 없게 된다. 차선이라고 해서 적당히 하다가 내키는 대로 그만 두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든 완벽에 매달리기보다 잘하는 정도에서 즐기고 만족한다는 뜻이다. 최선을 다하자고 하면 1등, 최고를 추구하게 되고 그것은 경쟁을 부추길 뿐 행복감을 주지는 못한다.


78쪽

내 마음속에는 지금도 철들지 않는 소년이 살고 있다.


어린 시절, 동무들과 밤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그 별을 주우러 뛰어간 적이 있다. 몇 시간을 달려가 풀밭을 헤매는데 한 친구가 "별이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우르르 몰려가자 친구가 작은 돌멩이 하나는 내밀었다. 너도나도 한 번씩 만져 보았다. 조금 따뜻한 것 같았다. 그때 별똥별을 줍던 소년은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옆에는 그 소년 또래의 손녀딸이 "할아버지, 별똥별을 유성이고요, 지구로 떨어질 때 대기권에서 다 타 버린답니다"라고 똘똘하게 일러준다.


기특한 손녀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는 나, 그래도 나는 여전히 별똥별 줍던 소년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아직도 유성은 별이 누는 똥이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내 안에 살고 있다. 그 소년 말고도 내 마음속에는 수많은 자제들 앞에서 두세 시간 열강을 하는 젊은 청년 의사도 있으며, 안방처럼 드나들던 히말라야 고산에서 가뿐 숨을 쉬며 '이제 산은 무리다'라고 인정하는 나이 든 산악인도 살고 있다. 인생의 시기마다 수많은 경험을 하며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열 살 때는 스무 살의 마음을 모르고, 30대에는 중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게 당연하다. 세월의 흐름을 따라 인간은 익어 가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스무 살이 되었다고 10대의 발랄함은 버릴 필요가 있을까. 마흔이 넘었다고 자식들에게 꼭 모범적인 아버지의 모습만 보여 줘야 할까. 노년이 되었다고 말마다 점잖은 얼굴로 세상을 통달한 것처럼 행동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가끔 가족과 동료, 제자들에게 엉뚱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양복 정장에 운동화를 신는다거나 늘 메고 다니는 크로스백 안에 사막에 떨어져도 사흘 같은 벼틸 수 있는 서바이벌 키트가 들어 있다고 먼저 소문을 내는 식이다. 전형적인 교수의 모습과는 다른 말과 행동에 제자들은 깜짝 놀라고 즐거워한다. 튀려고 한 행동은 아니다. 나는 그저 실용적이고 자유분방한 생각을 즐겨 할 뿐이다.


언젠가 보육원 아이들에게 시장에서 사 먹는 떡볶이 맛을 보여 주고 싶어 손수레와 떡붂이용 사각 팬, 가스통을 직접 사서 떡볶이 집처럼 꾸몄다. 나도 빨간 앞치마를 둘러 떡볶이 할아버지로 변신했다. 그렇게 한동안 진행했던 떡볶이 봉사는 아이들에게 인기 최고였다.


제자들의 회갑 잔치를 스승인 내가 치러 준 적도 있다. 나의 회갑을 축하해 준 것에 대한 나름의 보답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내가 처음 가르친 제자들이 60세가 되었음을 알았다. 아, 나의 첫 제자들이 어느새 회갑이라니! 감회가 유별났다.


나는 제자들에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찍은 사진을 20장씩 가져오라고 했다. 나는 그 사진에 글을 첨부하여 '아~~! 나의 60년'이란 제목의 CD를 구웠다. 그리고는 예약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회갑 기념으로 CD를 선물했다. 조촐한 회갑 잔치였다. "교수님이 제자 회갑 잔치를 차려 주는 경우는 본 적이 없습니다"라며 계면쩍어 하는 제자들에게 내가 말했다.


"살면서 형식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어. 서로 즐겁고 좋았다면 이것이 새 형식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스승이 제가 환갑을 치러 주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 나의 일탈(?)에 고마운 마음이 들고, 제가 아끼는 이 방식이 마음에 들면 너희들도 제자들에게 똑같이 해 주면 돼."


나는 내가 스승이라는 이유로 목에 힘만 주고 싶지 않았다. 나의 마음에는 장난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 주고 싶어 안달하는 소년이 살고 있다. '아, 이렇게 하면 재미있을 거 같아'라는 생각은 나이 들었닥 억누를 필요는 없다. 물론 평상시에도 소년의 치기로 살아간다면 문제겠지만 가끔 모두에게 행복감을 주는 느슨함은 꼭 필요하다.


나이답게 사는 것이 언제나 엄숙하게 살라는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건강하다. 인생이 재미있다. 그것을 잘 조율할 줄 아는 것이 진짜 어른이다.


139쪽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세 가지 일은 증오를 사랑으로 같는 것, 버려진 자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자기 잘못을 시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295쪽

모든 경우의 수를 감내하겠다고 생각하며 결정은 쉬워진다. 결단을 내리기 어려울 때는 다음을 고려하라.

하나, 최종 결정은 스스로 한다.

둘, 얻는 것과 잃는 것을 비교해 보라.

셋, 최악의 사태를 미리 예견해 보라.

넷, 멀리 보라.

다섯, 좋아하는 일을 택하라.

여섯, 쉬운 것부터 하라.

이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은 최종 결정은 내가 하겠다는 마음가짐이다. 내가 원하는 걸 정확히 아는 것, 그러면 인생은 조금 쉬원진다.



300쪽

사람들은 좋은 일하며 살아야 하는 건 잘 알지만 쉽지 않다고 한다. 돈을 번 뒤에 기부를 하겠다거나 복권에 당첨되면 뭉칫돈을 내놓겠다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다. 봉사를 특별하고 거창하게 뭔가를 확 바꿔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봉사가 어렵다. 임종이 가까운 이들에게 인생에서 후회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좋은 일을 많이 할 걸 그랬다는 답이 꽤 있다. '나중에, 다음에, 돈 벌면' 하다가 인생을 다 살아 버리게 되는 것이다. 나이가 등어 착한 일 좀 해서 천국행 점수를 따려고 해도 몸에 배여 있지 않으면 어렵고 불편할 뿐이다.


봉사는 일생 동안 조금씩 이뤄 가야 하는 것이다. 좋은 일은 꼭 물질적인 베풂만이 아니다. 불가의 적선積善은 한마디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인데 남을 향한 미소, 따뜻한 말 한마디도 좋은 일이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지 않게 하려는 것도 선善이다. 그런 마음가짐이 차곡차곡 쌓여 다른 좋은 일로 발전하게 된다.


303쪽

나는 제자들에게 좋은 일도 야금야금하라고 말한다. 야금야금, 당장은 티도 안 나지만 세월이 더해지면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고, 큰 것을 구할 수 있다. 좋은 일이나 봉사는 나이 들어 시간 날 때 하는 일이 아니다. 좋은 일은 힘이 있을 때 해야 더 값지다. 잘하려고, 거창한 것부터 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야금야금 내가 힘들지 않는 선에서 해 나가야 쉽다. 젊을 때는 쉬운 일이 늙어서 하려면 어려운 것들이 있다. 봉사도 그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