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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

남자들, 쓸쓸하다/박범신 산문집/푸른숲

이 책 오래전에 펴낸 책이다.

2005년에 초판이 발간된 책이다.

책의 저자는 박범신.

작년에 문단에 성추행이니 어쩌니 하는 것으로 유명세를 치른 작가이다.

신경숙의 문체를 좋아했는데, 그 분 표절로 인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고

이 분 역시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불의 나라>, <나마스테>

최근의 <은교>, <당신> 등으로 그 어느 작가보다 다작에다

좋은 소설을 많이 쓰는 작가 중 한 명인데 성추행 사건으로 곤역을 치렀다.

두 분 다 꽤나 내가 좋아했던 작가였기에 사람들의 그런 질타가 내 언니나 오빠가 당한 듯

많이 안타까웠다.


설날이라 내려온 딸아이가 늦잠을 자기에 깨우러 갔다가 그 방 책꽂이에 꽂혀있는 이 책을 보았다. 오래전에 꽤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어서

세월 지나서는 어떤 느낌인지....다시 읽고 싶었다.

어떤 책은 그러지 않는가?

같은 책인데도 내가 어떤 마음가짐, 언제 읽었느냐에 따라 감정이입되는 부분도 다르고

느낌도 많이 다르다.

이 책은 산문집이기에 그냥 술술 읽히면서도 오래 명상해온 작가의 단단한 내공이 느껴진다.

공감가는 부분을 여기 옮겨 적어본다.


(25쪽)

일반적인 부부는 보통 세 단계를 거치면서 함께 늙는다. 첫번째 단계는 '연인'의 단계로서 살아가는 신혼 시절, 신혼이라는 것은 산술적인 시간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낭만적 연애가 결혼 후에도 지속되는 달콤한 기간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사회적 계약을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아내'와 '남편'의 역할이 명징하게 니뉘지 못하고 있으니 본질적으로는 제도권에 편입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시기이다.


이때의 부부는 '사랑지상주의'라는 '감흥'이 제일의 가지여서 웬만한 사회적 구조에 의해서도 훼손당하지 않는다. 설령 갈등의 요소가 있거나 성격 차이를 느낀다고 해도 사랑의 감흥이 절실하므로 '문제'를 사실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낭만적으로 느낄 뿐이다. 이를테면 남자가 여자에게 이렇게 저렇게 요구하는 것이나, 반대로 여자가 남자에게 이런 저런 불만을 갖는 것도 사랑의 문제로 환치해서 바로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웬만한 갈등과 문제는 아내에게 선물하는 장미꽃 한 송이, 남편에게 따라주는 포도주 한 잔으로도 한순간 봉합된다. 더 나아가 서로의 눈을 보면서 사랑을 확인하고 그 열정을 좇아 껴안고 입 맞추고 쓰다듬으면 해결되지 않을 문제가 없다.


나는 그래서 감흥으로 얻는 달콤한 관계의 신혼시절을 '에덴의 시대' 또는 '낭만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아직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의 부부 갈등이란 선과 악으로 구분지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에덴의 시대'는 얼마 가지 않는다. 그들은 어쨌든 일가를 이루어 계속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회와 깊숙한 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는 그들에게 에덴동산의 '사과'를 따먹으라고 때론 달콤하게 때론 근엄하게 속삭인다.


에덴동산의 간교한 뱀 역할을 맡는 것은 주로 그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가까운 이웃이다. 시댁 식구들과 친정 식구들, 그리고 가까운 친구 부부들의 간교한 뱀의 역할을 지원하고 나선다. 이를테면 '에덴의 시대' 또는 낭만주의 시대에선 도무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아내의 역할, 남편의 역할 등이 갑자기 매우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한다. 사회 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이란 당사자인 그들 자신이 사랑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단단한 구조로 다져온 보편적 경험으로 만든 사회체계에 의하여 결정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두 번째 단계인 '사실주의 시대'가 도래한다. 낭만주의 시대가 끝나면 그들은 결코 '남편'과 '아내'라는 상대적 구분을 잊어버리지 않는다. 예컨대 남편은 돈을 벌어야 할 확고한 책임이 있고, 아내는 밥하고 빨래하고 아이를 길러야 할 중차대한 역할이 있다고 자나 깨나 믿는 것이다. 오랜 기간 구축돼온 사회 체제 이념이 만든 역할인데도 그들은 그들 자신이 만들고 맹세해온 어떤 것보다 그 역할을 맨신함으로써, 스스로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길 자청하게 된다.


사랑의 프리즘을 통해 보지 않으니 이젠 모든 문제들이 낱낱이, 명확하게 '문제'로 인식된다. '낭만주의 시대'엔 기싸움을 하는 것 같지만 사랑싸움을 했었는데, '사실주의 시대'엔 사랑싸움을 하는 것 같지만 남편과 아내로서 악을 쓰고 기싸움을 하게 된다. 잘잘못이 명확히 보이고 요구할 것과 부응할 것이 냉철히 분석되니까 어느 한쪽에서 잘못하게 되면 심각한 '전쟁'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부부싸움을 가장 많이 하는 때가 바로 '남편'과 '아내'라는 상대적 관계로 살아야 하는 이 '리얼리즘의 시대'이다. 이혼의 대부분도 이 기간에 일어난다.

그리고 이 단계야말로 또한 혹독하게 길다.

세번째 단계는 이 기간을 견뎌야 누릴 수 있다.

사랑의 완성은-완성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지만-반드시 시간의 시험을 통과해야 얻는다. 누군들 '에덴의 시대'에 누리는 달콤함이야 버리겠는가. '남편'과 '아내'라는 사회적 이름으로 맞이하는 수많은 갈등과 문제들을 잘 겪어내고 나면 마침내 안정된 편화를 얻을 때가 오는데, 이때가 오면 그들은 고단한 남편과 아내의 옷을 벗고, 또 남자와 여자가는 경계도 허물고 '인간'이라는 동류항으로 묶이는 너그러운 시대가 도래한다. 잘 늙고 지혜롭게 견뎌온 노년의 부부들이 맞이하고 향유하는 이 시대를 가리켜 나는 '인간의 시대'라고 부른다. 어느 누구도 '에덴의 시대'만을 계속 누리진 않는다. 지혜롭게 늙으면 '리얼리즘의 시대'에서 끝나는 법도 없다. 그 너머에 남자니 여자니 하고 아웅다웅하지 않아도 되는 '인간의 시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108쪽)

연애시절은 은폐가 가능하다. 그러나 결혼은 다르다. 한솥밥을 먹고 한 지붕 아래서 매일 함께 자면서 누구의 며느리나 사위가 되고 또 누구의 어머니나 아버지로 살아가야 하는 결혼이란 철저히 리얼리즘적인 요소가 강하기 때문에 은폐나 추상이 깃들 수 없다. 모든 건 잔인할 정도로 낱낱이 드러나고 대비된다. 그런 점에서 결혼 생활이란 피차 상대편의 은폐된 것, 미화된 것, 추상화된 것들이 낱낱이 까발려지는 날의 연속이다. 어떤 땐 이 여자가 내가 연애했던 처녀 적의 그 여자가 맞나 하고 고개를 갸웃거릴 때도 있고, 어떤 땐 너무도 낯선 얼굴에 충격을 받고 할 수만 있다면 결혼을 되물리고 싶어질 때도 있다. 물론 그 점을 여자 쪽도 그럴 것이다.


아내와 결혼한 지 어언 30여 년.

30여 년이 긴 세월,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살아온 끝에 얻은 결론의 하나는 '우리 부부는 대부분 서로 안 맞는다는 것'이다.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마찬가지다. 이렇게 서로 맞지 않으면서 지난 30여 년을 도대체 어떻게 함께 살아왔을까 하고 생각할 때도 많다. 앞으로도 살면 살수록 안 맞는 부분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함께 사는 일이란 마치 서로 맞지 않는 것들을 하나씩 둘씩 찾아내고 쌓아가는 일인 것 같다.


뒷이야기도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 옮겨쓰고 싶은데 서서히 지친다.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