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널을 돌리다가 박범신 소설가가 그가 쓴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보았다. 박범신씨는 다작하는 작가이고, 내가 매달 구독하는 '좋은생각'에 논산일기를 꾸준히 쓰고 있기에 반가웠다.
"가장 아끼는 작품이 있다면 어느 것인가요?"
작가는 사회자의 질문에 바로 이 책 <당신>을 꼽았다.
<은교> <소금> 까지는 보았는데 이 책은 미처 못 보았었다.
어느해 방학을 맞아 여행가는 길에 인천공항 서점에서 <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를
사서 여행지에서 읽었다.
통 이해가 안되고, 일단 소설로서 읽는 재미가 없었다.
그 이후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았기에 작년에 나온 이 책도 몰랐었다.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호기심 많은 나,
당장 주문하였고,
그제 200쪽까지 어젯밤 나머지 387쪽까지 다 읽어버렸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부부의 이야기였다.
여자는 첫사랑 남자를 잊지 못하여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채 시집을 갔으면서도
첫사랑 남자를 평생 가슴에 품고 산다.
첫사랑 그 남자는 여자가 자신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조차 모른 채 고문으로 인한
정신병으로 죽는다.
그 이후에도 여자는 나이 일흔이 넘어설때까지 오로지 자신만을 바라보는 남자를
바라봐주지 않는다.
첫사랑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딸조차 거두지 않는다.
여자의 딸조차 그 남자가 먹이고 씻기고, 학교 보내고 준비물 챙기고, 과제 봐주고
한없는 사랑으로 보살핀다.
여자보다 세 살이 적은 그녀의 남편 주호백은
일흔이 넘어서면서 서서히 치매가 찾아오고
맑았다 흐렸다 하는 정신 사이사이
젊은 날 받았던 상처를 폭력이나 폭언으로 쏟아붓는다.
뒤늦게 자신이 남편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는 그녀,
결국 그녀는 남편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그남자가 가진 알레르기를 이용하여
마지막 가는 길을 도와주고
이후 영원히 그녀 곁에 두기 위하여
집 마당 홍매 아래 묻기에 이른다.
사랑은 위대하다
사랑은 또 잔인하다.
서로 마주보는 사랑이라면 좋을 터인데
때론 일방통행이라 슬프다.
노년의 삶, 치매....이런 주제의 소설은 젊은 소설가의 상상력이 아무리 뛰어나고
책이나 주변인을 통해 간접경험을 한다고 해도 감동적으로 쓰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세월따라 원숙해진 작가의 필체를 따라가며
평생동안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던 그녀가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되는 대목을 옮겨 적어본다.
"여보, 제발....."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에서 칼을 빼냈다. 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울음소리가 높아졌다. 그가 어린애처럼 내 품으로 와락 무너져온 것은 그다음의 일이었다. 얼결에 나는 그를 받아 안았다. 여보, 라고 불렀는지, 누나, 라고 불렀는지 확실하지 않았다. "처, 처음에는......"이라고, 그는 울면서 말했다. 처음에는 나를 죽이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내가 미웠다고 했다. 울음 때문에 그의 발음은 매우 불안정했지만 나는 대강 그의 고백을 알아들었다.
"나중에, 나, 나를 죽이려.....했어요......"
그 문장은 확실히 들렸다. 당신 자신을 죽이려 했으나 그 역시 실패했다는 고백이었다. " 나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그러니까 나를.....좀 도와주세요......."내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얼음이 쪼개지는 듯한 야멸찬 어떤 소리가 나를 강력하게 후려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가죽 채찍이 맨살에 호되게 감겨오는 것 같은 살찬 각성이었다. 나는 얼굴근육이 마비된 사람처럼 입을 쩍 벌린 채 그를 한껏 껴안았다. 아, 당신, 나의 주호백.....이라는 말이 내 안에서 폭죽처럼 터져나오고 있었다. 그런 극적인 경험은, 젊어 김가인을 만났을 때 느낀 후 두번째였다.
누구는 물처럼 가슴으로 스며드는 경우도 있다 하겠지만, 단 한 번의 채찍질로 이쪽 편의 심지를 쪼개며 들이치는 것이 사랑이라고 나는 늘 생각했다. 그것은 변하지 않는 나의 확신이었다. 주호백, 그와 평생 함께 살아오면서도 그와 함께 있지 못하고 천지간으로 떠돌았던 건 스무 살 그 여린 나이에, 새 초목에 불붙듯이, 나의 중심을 꿰뚫고 다가왔던 김가인, 그 사람 때문이었다. 부정하진 않겠다. 반세기도 훨씬 더 된 기억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후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심지어 평생을 함께해온 그에게조차 그러했다. 그는 내게 편의에 따른 동숙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할 수 있었다. 내 죄가 바로 그것이었고, 그에게 천형이 주어졌다면 그 역시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2011년 새해를 맞는 그 새벽, "나를 .......좀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면서 치매에 걸린 그가 나에게 무너져온 순간, 나는 분명히 단 한 번의 채찍질로 내 심지가 두 조각 나는 걸 보고 느낀 것이었다. 내 나이 일흔넷, 그의 나이 일흔하나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렇다. 내가 그를 사랑한 것은 바로 그날부터였다. 물론 나는 내가 잠든 사이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가 왜 나를 죽이려 했고 왜 자신의 가슴에 칼을 박으려 했는지에 대해 그에게 물어본 적도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는 나를 평생 사랑했으나 나는 바로 그날 처음으로 그에 대한 사랑의 불꽃같은 발화는 보고 느꼈다는 사실이었다. 그순간 나는 그를 다 알았으며 완전히 이해했다. 시간에 의해 저물던 일흔넷에 만난 놀라운 축복, 놀라운 고통의 시작이었다.(88쪽~90쪽)
그가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쓴 일기는 이렇다.
"여기, 내 관 속 같아요, 당신! 너무 추억이 많은 집인데. 당신, 언제든 여기 돌아오면 창 너머 좀 봐요. 오래오래. 여기에서 보는 풍경은 봄이 제일이지요. 봄이면 저 숲 어디에 내가 와 있는 줄 아시오. 아니, 당신 가슴속을 좀 들여다보구려. 평생에 걸쳐, 거기, 당신 가슴속에 내가 집 하나를 지었소. 고대광실로다가. 죽은 다음에도 들어가 살 집. 당신 가슴속인데 당신 허락을 받지 않고 몰래 지어서 미안해요. 미웠던 적은 있었지만, 당신과 헤어지고 싶었던 순간은 한 번도 없었소. 그런 점에서 나는 성공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참, 아무것도 후회하지 말아요. 후회하면 당신 가슴속에 지은 내 집이 무거워질 거요. 아이고, 그 집이 무거워지면 당신, 무슨 수로 걷고 춤출 수 있겠소. 당신은 춤출 때가 가장 아름다운데."(266쪽~267쪽)
가슴이 마구 무너진다. 당신, 이란 말이 왜 이리 슬플까. 함께 견뎌온 삶의 물집들이 세월과 함께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눈물겨운 낱말이다. 그늘과 양지, 함숨과 정염, 미움과 감미가 더께로 얹혀 곰삭으면 렇다, 그것이 당신일 것이다.(267쪽)
죽음은 모든 존재를 풍경에 편입시킨다. 죽음으로써 삶은 사각 틀 속의 풍경화로 들어간다. 우리 모두는 시간에 따라 물이 빠지고 색이 바래는 장구한 보편화 과정에 놓일 뿐이다.(294쪽)
이십 대 청춘이던 시절, 나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를 하는 게
참 부질없어 보였다.
'나는 저 사람이 마음이 드는데,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하면 어쩌나?'
그 끝없는 밀고 당기기가 감정소모로 여겨졌었다.
하느님이 하늘에서 보고 있다가
"너의 짝은 이 사람이다"
사다리타는 것처럼 알려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랬더라면 소설 속의 그 많은 이야기는 탄생하지 않았겠지.
그랫더라면 사랑에, 혹은 실연에 빠진 사람에게는 나를 위해 불러주는 노래같은
유행가 가사도 생기지 않았겠지.
사랑은 이렇게 일방통행이라서
사람마다의 가슴 속에 내부가 훤하게 잘 보이는 유리창이 하나씩 있지 않아서
그래서
사랑은 슬프고, 또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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