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에서 아는 것도 많고 나서기도 좋아하고 말도 잘하는 이 사람을 본 적이 있기에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키는 작고 연예인도 아닌 교수이면서 아줌마 퍼머를 야무지게 하였고,
고집스러워 보이는 그 였기에 그다지 끌리는 인상을 아니었다.
지난 주에 광주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이 책을 골라왔다.
다른 때 방학이면 평소 읽지 못했던 깊이있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방학하고 연 2주간 일주일은 연수로, 일주일을 출장으로 어찌나 바쁜지
제대로된 독서를 하지 못했다.
중고서점에서 골라온 몇 권의 책 중에서 이 책을 가장 먼저 읽기 시작했다.
술술 너무 잘 읽혔다.
글이라는 게 적당한 가식이 섞이기 마련이고
나를 미화시키고, 나의 치부는 되도록 들춰내지 않는 게 작가의 능력(?)인데
이 사람 김정운 교수 너무나 솔직하여 끌렸다.
그동안 TV를 통해 봐왔던 단편적인 이미지가 쌓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기에 충분했다.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고,
자유분방한 사고도 아주 맘에 들었다.
"남자의 물건"
이어령/신영복/차범근/문재인/안성기/조영남/김문수/유영구/이왈종/박범신
이 분들의 애장품을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는 식으로
책은 구성되어 있다.
책 표지의 제호는 지금은 세상을 떠난 신영복 교수가 썼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솔직한 문체에다 스스로 괴짜로 칭하는 김정운 교수 특유의 화법이 인상적이라
옮겨 적고 싶은 부분이 유난히 많았다.
"인생에서 피크는 만드는 거 아니여!"
"피크를 만들면 내려오는 길밖에 없는거야. 피크가 눈에 보이는 듯하면 산을 바로 바꿔 타야 해."
이어령 선생이 하신 말씀이란다.(4쪽)
49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자신의 삶에 감사할 줄 안다. 그래서 가끔은 외로워야 한다. 가슴 저린 그리움이 있어야 내가 이제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기쁨, 내 가족에 대한 사랑, 내가 소유한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가 생기는 까닭이다. 나이 들수록 내 삶이 허전한 이유는 그리움이 없기 때문이다. 도무지 그리운 게 없으니 삶에 어떤 기쁨이 있고, 무슨 고마움이 있을까.
삶에 아무런 기쁨이 없을 때는 처절하게 고독해보는 것도 아주 훌륭한 대처법이다. 혼자 떠나는 거다. 제주도의 갈대밭을 혼자 헤매거나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나 골목을 헤매보는 거다. 휴대전화, 노트북 모두 놓고 떠나는 거다. 하루 종일 아무 목적지 없이 낯선 길목을 기웃대며 걷는 거다. 혼자 밥 먹고 혼자 뒹굴며 자는 거다. 중간중간 노천카페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는 청승도 떨어보자.
옛날에는 무조건 공부를 잘해야 했다. 좋은 대학을 나온 게 인생의 행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때는 인생이 진짜 짧았다. 지금 학부모 세대가 대학에 다니던 1970~1980년대의 한국인 평균 수명은 60세를 겨우 넘긴 수준이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100세를 넘겨 산다. 아주 오래 산다는 이야기다. 평균수명 60세 때의 20세와, 평균수명 100세 때의 20세의 존재론은 전혀 다르다.
우리의 자녀들은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굵고 짧게 사는 세상이 아니다. 길게,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세상이다. 인생의 기회도 여러 번 온다. 좋은 대학 가는 것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훨씬 더 행복한 세상이다. 오래오래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젊어서 일찍 잘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
69
시간이 미쳤다. 갈수록 정신없이 빨리 간다. 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자꾸 빨리 가는걸까? 심리학자들의 대답은 아주 단순명료하다. 기억할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내용이 많으면 그 시기가 길게 느껴지고, 전혀 기억할 게 없으면 그 시기가 짧게 느껴진다. '회상효과reminiscent effect'다.
인생에서 어느 시절의 기억이 가장 뚜렷하냐고 물으면 대부분 학창시절을 언급한다. 노인들도 학창시절의 기억은 아주 생생하게 이야기한다. 가슴 설레는 기억이 많은 그 시절의 시간은 자우 천천히 흘렀다. 모두가 새로운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의 어느 시기부터 시간은 아주 미친 듯 날아가기 시작한다. 당연하다. 정신없이 바쁘기만 했지 기억할 만한 일들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92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차이게 관대해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그렇다.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 심리학과으 제임스 페네베이커 교수 등은 8세부터 85세까지 3280명의 일기 같은 기록과 유명작가 열 명의 작품들을 분석했다. 일반인들이 사용한 3800만 단어와 작가들의 900만 단어를 나이에 따라 분류해보니, 나이가 들수록 긍정적인 정서를 더 많이 표현하고 있었다. 분노, 좌절, 슬픔과 같은 단어들은 젊은이들의 단어였다.
95
남자들의 표정이 그런 건 하나도 안 즐겁기 때문이다. 의무와 책임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태도는 감각기관을 통해 그대로 전달된다. 인간 상호작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굴 표정, 몸짓, 말투다. 심리학자 메라비언은 상대방과 이야기할 때 시각이 55퍼센트, 청각이 38퍼센트의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정작 전달하고 싶은 말의 내용은 고작 7퍼센트라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을 이 시각과 청각의 비언어적 표현을 읽어내는 시간은 0.1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말을 꺼내기 전에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가 결정되다는 이야기다.
101
내 마음이 제대로 작동하는가를 판단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마음의 건강은, 하루에 도대체 몇 번이나 기분 좋게 웃는가로 판단한다. 우리는 즐겁고 행복하려고 산다. 행복과 재미의 신체적 증상은 웃음이다. 그런데 종일토록 제대로 웃었던 기억이 전혀 없다면 그건 뭔가가 분명 잘못된 거 아닌가? 기껏해야 비웃음, 쓴웃음 아니던가? 마음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데, 어찌 몸이 제대로 작동하겠는가? 마음의 질병은 반드시 몸의 질병으로 이어진다는 게 '심신의학 psychosomatics'의 핵심이다.
262(이부분은 웃기면서도 재밌어서 길게 옮겨 적어본다)
조영남과 함께 kbs에서 하는 '명작 스캔들'이라는 방송을 한 적이 있다. 방송 끝나고 밥 먹다가 나온 이야기다. 조영남은 이 공약 걸면 바로 당선된다고 자신 있어 한다. 들어보니 정말 당선될 것 같다. '결혼중임제'다 조영남이 대통령 후보로 나서면 결혼 생활은 딱 5년만 하는 걸로 공약하겠다는 거다.
정말 아쉬워하는 부부가 있다면 상호 합의하에 다음 5년은 연장 가능하게 해주는 거다. 그러나 더 이상은 절대 안 된다. 인류 평화를 위해 같은 부부가 10년 이상 사는 건 절대 안 된다는 거다. 그러면 국가의 가장 큰 문제인 저출산 문제로 자동적으로 해결된다는 거다.
내가 "그럼 부통령 후보로 나서겠다' 하고 듣고 있던 다른 남자들도 좋아라 반색을 하니 조영남은 정색을 하며 그런다. 오히려 여자들이 더 좋아할 거라는 거다. 오늘날 일부일처제의 피해는 여자들이 더 많이 보고 있다는 거다. 다들 남편을 갈아치우고 싶어 하기 때문에 여자들 표가 다 자기에게 온다는 거다. 물론 언제까지나 남자들에게 가정의 권력이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머리 나쁜 남자들도 자기를 뽑을 거라는 거다. 요약하자면 '여자들은 지금 남편을 갈아치우고 싶어서 조영남을 뽑고, 머리 나쁜 남자들은 다른 여자들과 살 수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조영남을 뽑는다'는 이야기다. 그러고는 내게도 묻는다.
"아, 니 부인은 너랑 결혼중임에 찬성할 것 같으냐?"
조영남은 정말로 여자를 좋아한다. 그러나 보통 남자들이 여자를 좋아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두 번의 이혼 그리고 방송에서 조영남이 농담으로 던지는 어설픈 여자 이야기로 조영남을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랑이 먼저고, 법과 제도는 나중이다.
그 순서를 아는 조영남은 여자를 진짜 사랑하는 법을 안다. 철학자들이 폼 잡고 이야기하는 사랑 말고, '선데이서울'식 사랑 이야기 말고 '진짜 사랑'이 어떤 건지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잘 모르겠다면, 조영남의 <어느날 사랑이>란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우리 시대에 진짜 사랑은 이토록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조영남 같은 사람이 적어도 한 명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즐겁다. 나는 촬영차 떠난 이집트의 호텔방에서 하룻밤에 그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그에게 바로 국제 전화해서 이야기했다.
"존경합니다. 형님!"
282
개인도 마찬가지다. 아이덴티티, 즉 인간의 정체성은 자신의 현재 처한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된다. 승승장구, 탄탄대로를 달릴 때는 과거의 긍정적 사건들만 기억난다. 힘든 기억들 조차 의미 있는 고통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현재가 어렵고 견디기 어려우면 끊임없이 힘들고 괴로웠던 일들만 기억난다. 힘든 현재가 고통스런 과거를 불러내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런 기억의 왜곡이 바로 우울증이다. 그래서 우울증이 무서운 것이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301
도대체 왜 한국 남자들은 행복하지 못할까? 왜 다들 이토록 일사분란하게 침울한 표정일까? 나이가 들수록 자꾸 우울해 지는 까닭은 또 왜일까?
내 문화심리학적 분석은 아주 단순하다. 끝없이 타인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는 획일화의 굴레가 한국 남자들의 일상을 지배한다. 그래서 식당에서 혼자 밥도 못 먹는다. 음악회는 물론, 극장에 혼자 가는 것도 쉽지 않다. 남들이 나를 '사회부적응자'로 볼까 두려운 탓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자. 누구도 내가 혼자 밥 먹는 것, 혼자 음악 듣는 것에 관심 없다. 그런데도 그들의 눈길을 두려워한다. 정말 희한한 현상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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