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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풍경/발길이 머무는 곳

(장흥여행) 장흥댐 송낙, 갈두, 단산마을 망향비 앞에서


 

내 장점의 하나는 호기심이 많고

추진력이 강하다는거다.

궁금한건 물어봐야 직성이 풀리고

한 번 약속한건 천재지변이나 될 정도의 큰일이 아니면

웬만해서는 계획대로 밀고 나가는 편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밀어붙이는 통에

난처한 경우도 생기지만

오래된 친구 사이의 모임을 추진할 때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얼마전 한승원 작가의 '물에 잠긴 아버지'를 읽고서

장흥 유치면을 중심으로 십 년전에 완공된

장흥댐이 어떻게 생겼는지 가보고싶어졌다

특히 소설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대화를 나누는

학산마을 망향비가 궁금했다

마침 유치가 고향인 선생님이 계시기에

퇴근 후 그분을 길잡이 삼아 장흥으로 향했다.

 



맨 처음 당도한 곳은 장흥군 부산면에 위치한

장흥댐 물 문화관이었다.

관리인 한 명도 없는 그곳에는

넘어가는 노을, 새털구름, 그리고

멈춘 듯 고요한 물만 가득했다

저 물 속 어드메 누군가의 고향이 머물러 있겠구나

고향을 잃는다는 건 참으로 슬픈 일이겠구나

소설을 읽어서인지 괜히 슬퍼졌다

 



동행한 선생님이 멀리 댐 건너편을 가리키며


"저 곳에 대리분교, 오복분교가 있었고요~~그 앞 쪽에 마을이 있었어요....."



 


그러고보니 송낙마을 망향비가 보인다

내용을 읽다보니 그 절절함에 목이 메인다


마을 유래


송낙마을은 앞쪽에서는 유치천이 좌측에서는 옴천천이 서로 합류하여 기억산 밑을 휘감아 흐르는 삼각지에 자리 잡은 마을, 인심좋고 살기좋은 마을이었다.


길 가는 노승이 잠시 쉬며 송낙을 벗어 놓은 자리라 하여 송낙마을이라 칭하였다. 그래서 장삼들 목탁뱀이 주렁뜰 버래들 웃각골등 윤내들 삼막골 부양골 보리모퉁이 기억산 전설만큼 유구하다.

조선말기부터 설촌하여 6.25이후 34가구로 성촌되었으나 잦은 이논으로 수몰 당시 22기구로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장흥댐이 마을도 집고 전답고 모두 삼켜버려 그리운 고향을 뒤로 하고 어디론가 한 집 두 집 떠나가고 임자 없는 빈 터에는 푸른 물만 깊이깊이 잠들어 말이 없구나.


실향민들이여, 고향을 잊지말고 1년에 한 번이라고 이곳에서 서로 만나 못다한 정 나누고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사시든 부디 대대손손 건강하시고 행복하게 살아다오.


2005.12. 이주민 일동



다시 길을 나서서 광주가는 도로를 타고 7~8분 가다보니

장흥댐휴게소가 나온다

그곳에는 제법 큰 부락인 갈두마을 망향비와

단산마을 망향비가 앞뒤로 나란히 있다

모두 고향을 잃은 설움과 그리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실향의 한


머언 옛날 조상님적 생활터전 여기 잡아 논밭 일구어 마을을 꾸며 살 때 뒷산 높은 바우 칡넝쿨이 무성하여 마을 이름 갈머리(葛頭)라 한 것인가?


병품바우, 문바우재, 돛대봉 뒤에 두고 범바우산 엎드려서 청용 백호 감싸 안아 안산을 바라보니 동네 명당 여기로세


아들딸 많이 낳아 자자손손 지켜오며 한 성받이 아니어도 친족처럼 다정하여 마을 앞 당산나무 오갭여 년 살아오며 삼복더위 시원한 그늘 길손들도 쉬어갔고 주민들 희노애락 길이길이 보전 할 때

국책사업 장흥댐이 많은 물을 가두어서 우리들 정든 고향 깊은 물에 잠기고 다정했던 이웃들은 곳곳으로 떠났네.


이곳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

2006년 4월 30일

갈두마을 실향인 설립하고 출향인 후원하다


 

 

단산리 연혁


오호 통재라! 국책사업 시행으로 탐진강 상류에 장흥댐 성토되어 조상 대대로 지켜 온 고향 마을이 수장돼 선인의 서글픈 마음을 억누르며 여기 이 빗돌에 우리 단산 마을의 연혁을 새기노니 후인을 애써 읽을지어다.


마을의 이름은 검단(檢丹)이라 했다. 마을 앞 도로변에 4기의 커다란 지석묘가 있었으며, 장흥읍지에 내검단이 삼한고기(三韓古基)로 기록되어 있어 3천년 전 청동기 시대부터 성촌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사에 봉출어단산하여 본 마을의 주산 주산 두륜봉(두리봉)과 조산 시루봉(증봉)에 아홉 봉황이 마을을 늘 점검하여 놀았기에 예전엔 검단이로 불리우다가 일제강점기에 단산(丹山)으로 개명하였다.


~중략~


단산리 상기를 살피건대, 서기 1680년경 남평문씨 이우께서 아들 필서, 필한 필거 삼형제를 데리고 이숭 오복동에서 이주해 와 내검단 초입에 새로운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후 80여 년이 지나 장흥위씨 수장, 수택 형제분이 합류해 양 가문이 날로 번창하였다. 또한 농토가 넓고 비옥하여 산물이 풍족하고 민심이 후하였다. 3백여 년 동안 동거동락하며 향약과 가례의 양 속이 어어져 널리 행의지촌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다만, 한국동란(6.25)시 온 마을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고서 흩어졌다가 수복되어 각기 자기 터에 초막을 지어 재기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데, 장흥댐 건설로 이제는 우리들으리 안태본을 잃어버린 영원한 실향민이 되고 말았다.


오호 애재라! 금일 벽수에 잠긴 실지를 망연히 바라보나니, 무상한 시대의 변천을 탓해 무엇하랴. 이제 우리 헤어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2006.9.


문정배 근찬(謹撰)

 



 

휴게소 곳곳에는 물속에 잠기기 전후의 여러 사진이

크게 확대되어 액자에 넣어진 채 벽에 걸려있다

끝까지 집에서 나가는 걸 거부했을까?

경찰과 공무원으로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

집을 허물기 전 나가지 않으려 버티는

늙은 어머니의 모습,

물에 잠기기 전 마을의 정경,

아이들이 뛰놀던 학교의 모습,

망향비 앞에 선 사람들의 숙연한 모습 등이 보인다

 


 

 

 

 

 

망향비보다 이 사진들이 더 내가슴을 울린다

나는 물속이 고향인 실향민도 아니건만

누군가의 삶의 터전이자, 탯자리, 추억의 장소가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는 생각에 콧날이 시큰해진다



비록 처음에 의도한 학산마을은 가보지 못했지만

소설 속 장소를 찾아 떠난

짧지만 의미있는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