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다 읽었다.
가슴이 먹먹하다.
소설이지만 작가의 고향이 이 소설의 주무대인 장흥군 유치면 이기에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 자전소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내가 근무하는 곳에서 20분쯤이 걸리는
장흥군 안양면에 한승원 선생님 터 잡고 사는 <해산토굴>이 있기에
나는 당연하게 이 분의 고향도 장흥군 안양면이리라 생각했다.
그랬는데, 글을 다 읽고 마지막 작가의 글을 읽고서야
나는 이 분의 고향이 유치면이라는 걸 알았다.
수몰민을 주제로 한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작가 문순태씨의 소설에서도, 임철우씨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은 많았다.
처음에는 잘 안나가는 소설이었다.
최근에 아버지를 뛰어넘어 전 세계 문단의 주목을 받는 '한강'씨의 아버지로서
더 알려져 있지만, 나는 이 분의 소설을 참 좋아하는 팬이었다.
그랬는데.....잘 안 읽혔다.
아~~ 이 분도 나이가 들었구나.
그런 불손한 생각을 했다.
시간처럼 위대하고 시간처럼 잔인한 것도 없다는 생각을 자주 하기에
시간이 이 분의 총총함과 문학적 상상력을 앗아가 버렸나 생각을 했다.
중간 이후부터는 엄청난 흡입력으로 밤을 새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빨치산 대장 김동수를 아버지로 둔 죄로 아버지, 어머니, 형 넷을 한 꺼번에 잃고서도
먼저 엎드리고 낮은 곳으로만 흐르면서 목숨을 부지하고
아내 한영애와 만나 8남 3녀를 낳고, 가르치며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 온 이 시대의 우리 아버지 이야기였다.
평생을 땅만 파고 살던 농사꾼이 밤도망 도시빈민이 되어
고층 유리창 청소부, 삐에로, 산타클로스가 되어 웃음을 팔고
부자 아파트의 가난한 경비원이 되어서도
그 많은 자식들을 가르치면서 희망을 이어가는
이야기였다.
그 중 천재 소리 듣던 큰아들 일남이에게 거는 기대는 맹신에 가까웠지만
우리 시대 누가 아버지 김오현을 손가락질 할 수 있으랴.
찬바람이 먼지를 쓸면서 달려왔다. 월말고사를 치르고 난 학생들이 단체로, 한길 건너에 있는 극장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보러 왔다. 학생들은 백화점 앞에 서 있는,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복장을 한 그를 보고 신기해하였다.
:우와, 산타클로스가 진짜 살아 있는 사람 같다."
한 아이가 이렇게 말하자 아이들이 그에게로 몰려왔다. 그는 그 아이들 가운데, 아들 칠남(김오현의 일곱번째 아들)이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칠남이를 발견하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과 정수리에 시린 전율이 일었다. 코끝이 시큰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이들은 그의 다리를 만졌다. 산타클로스가 살아 있는 사람인가, 마네킹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아이들은 두 패로 갈려 우겼다. 마네킹이라고 우기는 아이들은 그의 허벅다리를 꼬집으면서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사람이라고 우기는 아이들도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흐르는 눈물을 닦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산타클로스가 운다. 꼬집지 마라"하고 소리쳤다. 마네킹이 아니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라고 아이들은 깔깔거리며, 푸른 신호등으로 바뀐 건널목으로 달려갔다. 칠남이는 달려가다가 그를 돌아보고 또 달려가다가 뒤돌아보았다. 파란불이 깜박거렸고, 인솔 선생이 호루라기를 불며 손짓을 했고, 아이들은 모두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제발 칠남이가 그를 알아보지 못했으면 하고 바랐다.
두 시간 쯤 뒤 영화를 본 아이들은 인솔 선생을 따라 버스에 올랐고, 그 버스는 우이동 쪽으로 멀어져갔다. 서쪽 하늘에서 황혼이 타오르다가 꺼지고 땅거미가 내렸다. 가로등들이 거무스레한 땅거미를 묽어지게 만들었다. 밤 아홉시에 그는 산타클로스 복장을 벗고, 일당을 받아들고 학생들이 건너던 횡단보도를 건넜다. 횡단보도 옆에 군고구마 장수가 있었다. 따끈따끈한 군고구마 한 봉지를 샀다. 그것이 식지 않도록 가슴에 안았다. 군고구마들의 따끈한 온기가 가슴 살갗으로 밀려들었다.
우이동 종점에서 내려 비탈진 골목길을 올라갔다. 찬바람이 등뒤에서 불어왔고, 마른 가랑잎들이 들쥐들처럼 그를 앞질러서 달려갔다. 가지색 밤하늘에 자잘한 별들이 떠 있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그는 마중나온 아이들에게 둘러싸였고, 고구마 봉지를 내밀었다. 방으로 들어간 아이들은 고구마 봉지를 뜯어 따뜻하고 달콤한 고구마를 한 개씩 나누어 먹었다. 한데 칠남이는 구석으로 돌아앉은 채 팔뚝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고구마를 먹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칠남이의 얼굴을 넘겨다보면서 "칠남이, 고구마 맛있니?" 하고 묻자, 칠남이는 이불 속으로 얼굴을 묻으면서 엉엉 울어버렸다. 그는 말없이 등뒤에서 칠남이를 보듬어주면서 등을 토닥거렸다.(228쪽)
소설은
마흔 중반에 서울로 밤도망을 친 이후 일흔이 넘어
시와 소설을 쓰는 김오현의 7번째 아들 칠남이와
이제는 물길이 되어 수몰된 그의 고향 장흥군 유치면 학산마을 망향비를 둘러보고
지난 날을 되돌아보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때로는 아들 칠남이의 시점에서
때로는 아버지 김오현의 시점에서
허름만 모텔방에서 맥주잔을 기울이면서
밤새 이야기하는 내용이다.
오현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인해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었다. 그날 밤 그는 아파트의 경비원 노릇을 계속할 것인가, 돈을 두 배 가까이 준다는 국제전자의 창고 관리인으로 갈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고민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 남자의 아버지 박장수가 토벌대 대장이었다는 것, 빨치산 대장인 그의 아버지를 죽인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 노인과 나는 슬픈 악연 아닌가. 그렇지만 육십 년의 세월이 흘러버린 이제, 많이 달라져버린 세상 속에서 당시의 이념 대립으로 인해 일어난 비극을 괘념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오현은 할아버지가 하던 말을 떠올렸다. "장마철의 곰팡이를 이기는 것을 가뭄이고, 가뭄을 이기는 것은 번개와 우레고, 번개와 우레를 이기는 것은 햇볕이고, 그 햇볕을 이기는 것은 꽃그늘이고, 꽃그늘을 이기는 것은 밤이고, 밤을 이기는 것은 잠이고, 잠을 이기는 것은 아침이고, 아침을 이기는 것은 지심이고, 천심이라는 것이다."(269쪽)
소설 한 편으로 세상의 참모습을 확인하려 할 때 나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리곤 한다.
꽃 지면 열매 있고
달 지면 흔적 없네
이 꽃의 있음을 들어
저 달의 없음을 증명하리
한국문학사 속에는 '남로당원'을 아버지로 둔 작가들이 있다. 분단 국가인 대한민국 정부는 남로당원을 적대시했고, 당사자는 물론 그 가족들에게 탄압과 박해를 가했고, 그 가족들은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았다.
이 소설은, 비극의 땅 유치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영욕에 깊은 상처를 입은, '아버지가 남로당원'이었던 한 남자의 삶을 형상화시킨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죽지를 펴지 못하고 주눅이 든 채 자투리 인간(잉여 인간)으로 살아온 남자의 한스러운 삶.
내 고향 전남 장흥의 유치면 일대는 가지산 자락에 둘러싸여 있는 협곡 안의 분지인데, 육이오 한국전쟁 이후 한동안 '모스크바'라고 불렸다. 북으로 가지 못한 남로당원들이 이 산골짜기를 접수하고, 토벌하려는 경찰대와 일진일퇴의 피비린내 나는 빨치산 투쟁을 벌였던 지역이다. 가지산 자락은 구산선종(九山禪宗)의 으뜸 고찰인 보림사를 품고 있는데 전각들은 그때 불타버렸다가 이제는 모두 재건되었다.
그 유치가 십 년 전에 장흥댐의 짙푸른 물너울 속에 잠겨버렸다. 장흥댐은 수자원공사가 2006년까지 십 년 동안 6712억 원을 들여 완공했다. 장흥의 유치면 부산면, 강진군 옴천면 일부의 697세대 2100명의 수몰민이 발생했는데, 댐은 높이 53미터 길이 403미터 저수용량 약 2억 세제곱미터이고, 목포, 완도, 신안, 무안, 해남, 진도, 영암, 강진, 장흥 지방의 물 부족을 해소하는 데 한 해 약 1억 3000만 세제곱미터를 공급한다.(284쪽 작가의 말에서 옮겨 적다)
희수(喜壽)를 맞은 작가의 아들딸의 효의지로 펴내게 되었다는 이 책,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익어갈 뿐이다"
책을 읽은 소감을 한 마디로 말하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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