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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감동이 있는 글

사흘만 볼 수 있다면 1

  우리 모두는 한정된 시간밖에 살 수 없는 영웅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읽습니다. 그 시간은 1년이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24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가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어떻게 쓰는가는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살아 있는 마지막 순간에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서 어떤 행복을 찾을 수 있고, 무엇을 후회해야 할까요?


  저는 우리가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훌륭한 삶을 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세로 산다면 인생을 소중하게 여길 테니까요. 우리는 매일매일 너그럽고 열심히 그리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야 하지만, 우리 앞에 수많은 날이 남아 있다는 생각에 그런 마음을 잊고 맙니다.


  이갸기 속에 한정된 시간만 살도록 운명 지어진 영웅은 대체로 어떤 운명의 힘에 의해 마지막 순간에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삶에 대한 그의 생각은 달라집니다. 삶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되지요.


  반면, 우리 대부분은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언젠가는 우리도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먼 미래의 일로 생각하지요. 건강할 때는 죽음을 상상조차 하지 않아요. 우리 삶이 끝없이 계속된다고 생각해서, 우리가 삶에 얼마나 무관심한지 깨닫지 못한 채 사소한 일에 매달립니다.


  청각 장애인만이 청력을 소중하게 여기고, 시각 장애인만이 빛이 보여주는 축복을 인식합니다. 특히 어른이 돼서 시력이나 청력을 잃은 사람들은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눈이 잘 안 보이거나 귀가 잘 안 들리는 일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그 축복받은 기관을 최대한 충분히 사용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가진 것을 잃어 보기 전에는 그 소중함을 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저는 사람들이 막 어른이 됐을 무렵, 이삼일 동안만 시력과 청력을 잃어 본다면 큰 축복이 되리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어둠이 빛의 소중함을, 침묵이 소리의 즐거움을 가르쳐 줄 테니까요.


  때때로 저는 볼 수 있는 친구들이 무엇을 보는지 알고 싶어 실험을 해 봅니다. 최근 한 친구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숲길을 오랫동안 걸어왔다고 했습니다. 숲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더니 친구는 "특별한 것 없는데."라고 하더군요.


  저는 생각했습니다. '한 시간이나 숲 길을 걸었는데도 어떻게 특별한 것을 찾지 못하지?' 볼 수 없는 저는 단순한 촉감만으로도 수백 가지 흥미로운 것을 찾아냅니다. 잎이 섬세하게 나란히 나 있는 모습을 느끼고, 손을 뻗쳐 은빛 자작나무의 부드러운 껍질이나 소나무의 거친 등걸을 만져 봅니다.  봄에는 대자연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첫 표시인 어린잎을 찾기 위해 나뭇가지를 만져 봅니다. 아주 운이 좋으면 작은 나무에 손을 올려놓고, 목청껏 노래하는 한 마리 새의 행복한 떨림을 느끼기도 하지요.


  때론 제 마음도 이 모든 것을 보고 싶어 울부짖습니다. 단순한 촉감만으로도 그렇게 많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데, 시각이 펼쳐 보이는 아름다움은 얼마나 더 많을까요! 그렇지만 볼 수 있다고 해서 분명히 제대로 다 보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채우는 빛깔과 움직임의 파노라마를 당연하게 여깁니다. 시각이라는 선물을, 삶을 충만하게 만드는 수단이 아니라 단순히 편리함 정도로만 여기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 74쪽에서 옮겨 적다.

(이 글은 1933년 월간 애틀랜틱 1월호에 실린 헬렌 겔러의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