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이 마구 무너진다. 당신, 이라는 낱말이 왜 이리 슬플까. 함께 견디어 온 삶의 물집들이 세월과 함께 쌓이고 쌓여 만들어진 눈물겨운 낱말이다. 그늘과 양지, 한숨과 정염, 미움과 감미가 더께로 얹혀 곰삭으면 그렇다. 그것이 당신일 것이다."
나의 최근작 <당신-꽃잎보다 붉던>이란 소설 본문의 한 구절이다. 치매에 걸려 죽어 가는 노부부의 눈물겨운 순애보로 써진 이 소설은 정염을 따라 바람같이 살고 싶었던 여주인공과 사랑하는 사람의 가슴속에 평생 제집을 짓고 싶었던 남자 주인공의 평생에 걸친 비극적 사랑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사람들이 묻는다.
"혹시 작가의 이야기인가요?" 아니다. 나는 치매에 걸리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이런 인생을 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돌아보면 아내와 함께해 온 43년의 세월이 이 소설의 행간 너머 곳곳에 깃들어 있는 건 사실이다. 이를테면 이 소설에서 남자 주인공은 아내의 키랙터에 가깝고 여자 주인공은 나의 캐릭터에 가깝다.
아내와 살아온 긴 결혼 생활을 나는 흔히 3단계로 비유한다. 첫 번째는 '낭만주의'단계로 연애가 결혼 생활을 지배하는 단계다. 어떤 생물학자는 이 단계를 '정염'의 단계로 구분한 바도 있다. 이 단계는 길어야 3년을 넘지 않는다. 모든 연애는 일상화의 시험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두 번째 단계를 '리얼리즘(사실주의)'단계라고 부른다. 생활이 연애의 낭만성을 지배하는 기간으로 결혼 생활에서 가장 길고 혹독한 단계다. 이때 '당신'이란 말은 철저히 상대편을 가리킨다. '당신=You(너)'인 것이다. 그리고 나처럼 43년쯤 함께 살고 난 원만한 부부가 맞이하는 마지막 단계는 '인간주의'단계다. 서로에 대한 가파른 욕망은 해체되고 깊은 인간적 우의로 맺어져 있는 시기이다. 이때쯤엔 말하지 않아도 서로 말하고 싶은 걸 알아듣는 수준에 도달한다. 이 단계에서 사용하는 '당신'은 단지 상대편이 아니다. '당신=You(너), Me(나를). 또는 'Together(함께)'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최종적으로 이기지 못할 건 시간과 허공, 두 가지밖에 없다. 연애의 본질인 정염은 너무나 찰나여서 슬프지만 세월의 더께가 입혀진 '당신'은 시간을 넘어서서 그 시간의 유한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이를 갖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 '연애'는 슬픈 종말을 갖고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 '사랑'은 시간의 제한을 넘어설 수 있다는 뜻이다.(박범신 님/ 작가, 상명대 석좌 교수)
점심시간에 '좋은 생각'을 읽었다. 논산에 집 짓고 사는 박범신 작가의 짧은 글이 울림을 주어 옮겨적는다. 박작가님처럼 당신을 인간으로 보는 단계까지 이르러면 나는 아직 먼 듯 하다. 아직도 사실주의 단계를 열심히 지나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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