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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풍경/발길이 머무는 곳

<사천여행> 비와 안개에 싸인 와룡산 등반

6월 27일 사천 와룡산 등산

계획했고, 약속했던 일은 어지간하면 지키려고 하기에

흐린 아침인데도 길을 나섰다.

오늘의 목표는 사천 와룡산.

여러 번 왔던 산이기에 원래는 아래쪽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올라가야 하는데 우리는 와룡사 뽀짝 코앞까지 가서 주차 완료

 

이십여 분 쯤 올라 도암재에 올랐다.

안개에 싸여있어 한 치 앞이 안 보인다.

나름 운치가 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생각난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 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도암재에서 십 여분,

좀 힘든 오르막을 오르면 이런 돌무더기가 나온다.

누가 쌓았을까나?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절 입구 <돌탑사>와 연관있는 것은 아닐까 혼자 추측해본다.

 

 

 

 

안개와 간혹 흩뿌리는 비를 맞으며

세섬봉에 당도했다.

801.4m

 

 

 

 

 

드디어 민재봉에 당도하였다.

생각같아서는 백천재 쪽으로 내려가고 싶으나

차가 있는 곳으로 가려면 회귀산행을 할 수 밖에 없다.

날궂이 하는 사람은 우리 뿐 아니다.

명당 자리에 자리를 잡고 점심식사 중인 사람들도 보인다.

어라?

민재봉이 새섬봉보다 낮네?

옆에 계시던 혼자 오신 등산객이 말씀해주신다.

예전에는 민재봉이 더 높은 줄 알고 있었다고.

그런데 최근에 측량을 해 보니 새섬봉이 더 높아서

이후 이렇게 쓰고 있다고 한다.

 

 

곳곳에 여름 야생화가 피어 있었다.

우중이라 더 깨끗하고 멋져 보인다.

이슬 머금은 꽃잎이 진짜 호랑이 꼬리같다.

야생화 '범꼬리'

 

'까치수염'

 

이건 '털중나리'라고 알고 있는데 맞나요?

 

이건 '노루오줌'

 

이것도 나리...

 

뒤늦게 핀 '찔레꽃'

 

날카로운 가시가 없는 걸 보니 '엉겅퀴'는 아니고

가지가 여럿으로 뻗은 것도 아니니 '지칭개'도 아니고

아마도 '뻐꾹채'가 아닐까?

 

 

점심을 먹고 내려오는 길.

세상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간혹 가량비도 내리는데

세상에는 등산하는 우리 뿐인 듯

세상은 적막하구나.

 

그러나 상처가 남는다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오랫동안 우리는 다투었다. 그래서 전보와 나는 타협안을 만들었다. 한번만, 마지막으로 한번만 이 무진을, 안개를, 외롭게 미쳐 가는 것을, 유행가 를, 술집여자의 자살을, 배반을, 무책임을 긍정하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한번만이다. 꼭 한 번만, 그리고 나는 내게 주어진 한정된 책임 속에서만 살기로 약속한다. 전보여, 새끼손가락을 내밀어라.
나는 거기에 내 새끼손가락을 걸어서 약속한다. 우리는 약속했다.


그러나 나는 돌아서서 전보의 눈을 피하여 편지를 썼다. <갑자기 떠나게 되었습니다.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 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 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간단히 쓰겠습니다.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제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 놓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저를 믿어 주십시오. 그리고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대로 소식 드리면 당신은 무진을 떠나서 제게 와 주십시오. 우리는 아마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쓰고나서 나는 그 편지를 읽어봤다. 또 한번 읽어봤다. 그리고 찢어 버렸다.


덜컹거리며 달리는 버스 속에서 나는, 어디쯤에선가, 길가에 세워진 하얀 팻말을 보았다. 거기에는 선명한 검은 글씨로 <당신은 무진읍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씌어 있었다.
나는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김승옥 작<무진기행> 마지막 부분에서

 

 

내가 사는 회천에도 안개끼는 날이 많다.

보성의 녹차밭이 유명한 이유도 이곳의 안개가 적당히 습도를 조절해주어

녹차가 잘 자라기 때문이라 한다.

이곳을 지나다보면 진한 안개 탓에 간혹은 비상등을 켜야 할 때가 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에서는 안개를 핑계로 적당히 몽환적이고 일탈을 꿈꾸는 사람들의 마음이

잘 드러나있다.

주인공의 그 마음이 이런 안개끼는 날이면 간혹은 잘 이해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