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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풍경/일상의 풍경

와우, 신문에 글이 실렸어요.

내가 속한 모임 중 하나<광양문화연구회>는 한 달에 한 번 모여요.

일요일 오후 2시쯤 만나

-왜 2시냐면요. 회원 중 일부가 교회를 다녀요. 장로님도 있어요.-

광양주변을 탐방해요.

마을 고샅길도 돌고요. 광양의 나즈막한 야산도 등산하고요.

문화재가 있는 곳이나, 기념관도 가지요.

 

광양은 강진이나 장흥 등에 비해 문화유적이 적은 곳이예요.

뛰어난 문인도 적고,

-그래도 찾아보면 있어요. 대표적인 분인 정채봉님

사람들은 정채봉님이 순천 사람이라고 말해요.

또 순천만 주변에 정채봉 기념관도 있지요.

행정구역상으로 그 분의 출생지는 순천시 해룡면 신성포예요.

하지만  그 분은 할머니를 따라 광양읍으로 이사를 하여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광양에서 보냈지요.

당연하게도 글 속에 드러난 정서나,

그 분이 다닌 학교나

그분의 친구분들은

모두 광양사람들이랍니다.

 

그 분은 광양동초등학교, 광양중학교, 광양농업고등학교(지금은 광양실고)를 나왔답니다.

그 분이 쓴 <우리 읍내>라는 글에는 우리 읍내, 즉 광양읍의 모습을

너무도 사실적이면서 애정어린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지요.

광양읍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으며 읽을 수 있게 말이지요.

 

친한 친구분 중 한 분은 지금도 광양에 살고 계셔요(교감선생님으로 퇴직하셨지요)

친구분이 거문도에 근무할 때는

정채봉님이 거기까지 친구를 찾아 거문도까지 오기도 했다는걸요.

 

출생지가 순천이라는 이유로

정채봉의 고향은 순천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 중, 고를 다 광양에서 나오고,

이후 동국대학교 국문과로 진학했기 때문에

순천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고 봐도 무관하겠지요.

아참, 그 분은 순천시 용수동 천주교 공원묘지에 누워계시니까

돌아가신 이후의 삶은 순천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분의 기념관도 순천에 있고,

그 분의 이력에도 순천출생이라고 적혀있고,

청소년기를 보낸 광양의 흔적은 어디서도 찾을 길이 없네요.

안타깝게도..

 

오랜만에 정채봉님이 쓴 <우리읍내>를 함께 볼까요?

 

나의 소년 시절. 그 잔솔밭 터널을 나는 저 남녘, 매화와 안개와 보리와 은어와 동백이 어김없이 사계(四季)따라 찾아오는 작은 읍내 광양에서 보냈다.

읍사무소도, 공회당도, 향교의 담처럼 흙 속에 짚을 다문다문 넣어 만든 흙벽돌로 둘러싸인 곳. 서삭교로 불리던 서국민학교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모과나무가 운동장을 빙 둘러 서 있었고, 동삭교로 불리던 동국민학교 앞에는 방풍림으로 오래 전에 조성된 팽나무 숲이 짙었다.

나는 동삭교에 다녔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열매를 떨추려고 팽나무에 고무신을 벗어 던졌다가 신발이 높은 나뭇가지 위에 걸려 버려서 애를 태운 일이었다.

광양에는 영명한 인재도 많이 난다는 고장인데 반해 정신이 조금씩 어떻게 된 사람도, 어리숙한 사람도 많았었다.

비행기를 낚겠다고 간짓대를 들고 서산마루를 오르내리던 영달이며, 날이 궂을 때면 차부에서고 판장에서고 육자배기를 청승맞게 불러 어른들의 혀를 차게 만들던 연순네며 담배를 준다면 무슨 일이고, 심지어 아랫도리까지도 홀랑 내리고서 만세를 부르던 도열이며.

앉은뱅이 여씨는 자동차의 헌 타이어로 방석을 하고서 장을 돌아다니었다. 상여가 나가는 길에도 그 앞에 벌렁 누워서 돈을 얻어내곤 했으나 그렇게 적선 받은 돈을 번번이 노름판에서 날려 버리는 여씨였다.

신익이 형은 소아마비를 앓아서 옆으로 다리를 절며 걸어 다녔다. 그런데 공회당에 영화가 들어오면 틀어대는 스피커의 유행가를 모조리 배워서 거리에 다닐 때면 큰소리로 몇 곡이고를 이어서 부르곤 했다. 한 가지, 어린 우리들한테 괴로운 일은 신익이 형한테 붙들리면 그 따가운 턱수염으로 볼을 마구 문지르는 통에 울지 않곤 빠져나오지를 못한다는 것이었다.

여름이면 콩밭에 이슬이 무던히도 내리고 가을이면 새로 인 노오란 초가지붕마다에 새하얀 서리가 잦던 우리 읍내.

11월, 보리 파종을 할 때면 먼 백운산 상봉에 어느새 눈이 하얗게 덮여 있곤 했는데 삼십 리 밖 그 눈을 보면서 우리는 지레 손바닥에 호호 입김을 불곤 했다.

칠성리에는 대장간이 있었고 인동리에는 유기점이, 그리고 목성리에는 제제소가 있었고 도청 가는 냇가에는 물레방아간이 있었다.

한가한 대낮에 대장간에서 들려오던 망치 소리, 유기점에서 들려오던 풀무 소리, 제제소에서 들려오던 톱 소리가 도리어 아기를 재워주던 읍내.

광양의 팔경(八景) 가운데 최소한 나는 네 가지를 보고 자랐다. 곧 백운산 허리에 흰구름 걸치어 있는 경치, 범선들이 한가로이 하포(下浦)로 돌아오는 경치, 소금 굽는 가마에서 연기 올라가는 경치, 섬진강가의 대나무 숲에 비 내리던 경치를.

그러나 지금은 백운산 허리에 흰 구름 걸치어 있는 풍경 말고는 모두가 사라져 버렸다.

지난 봄 읍내의 양로당에 들렀을 때 영산홍은 여전히 그 한가로운 표정으로 피어나고 있었으나 노인들의 회한은 주름살의 골만큼이나 깊어 보였다.

춘삼월이면 동들 논마다에 질펀하게 피어나던 자운영 꽃. 맑은 도치바위 내에 떼지어 다니던 은어들. 집집의 남새밭에 피어나던 상추꽃이며 쑥갓 꽃들. 빙고등의 호밀밭 언덕에까지 내려와서 귀를 쫑긋거리던 산토끼들. 한가위면 먼 데 샛터나 들멀 마을에서 들려오던 아득한 징소리는 이제 그분들의 꿈속으로나 찾아가는가.

 

지금은 어리숙한 사람을 하나도 만나기 어렵고 모두가 정갈하고 바쁜 사람들뿐이어서 나한테 외로움을 느끼게 하는 아아, 우리 읍내 광양이었다.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많이 흘러가 버렸네요. ㅎㅎ 삼천포로...

 

2014년 <광양문화연구회> 사업은 주간으로 발행되는 광양신문에 글을 한 편씩

싣는 것입니다.

광양의 역사와 문화를 가꾸는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를 하고,

광양신문 한 면에 올리는 일이지요.

6명의 필자가 돌아가면서 참여하고 있는데

이번 주에 드디어 제 기사가 실렸습니다.

 

 

광양신문 1면이고요.

 

 

제가 쓴 기사는 8면에 실렸습니다.

향토음식, 전통음식 요리연구가이자, 2013년 신지식인으로 선정된

'오정숙'씨를 인터뷰한 기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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