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영묘 타지마할과 아그라성 관광,
6시간을 달려 밤늦게 자이푸르에 도착(제6일: 8월 21일)
무갈제국의 5대 황제인 샤자한(Shahjahan)과 그 황후 뭄따즈(Mumtaj)의 사랑이야기는 인도인들 사이에서 우리의 춘향전 만큼이나 유명하다고 한다. 황제와 황후의 관계라는 것은 흔히 정략결혼과 궁중의 음모를 연상시키지만 이 두 사람의 사랑은 정열적이었고 또 서로에게 헌신적이었다.
두 사람은 19년 동안의 결혼 생활에서 14명의 아이들을 가질 정도로 금슬이 좋았다. 1631년 뭄따즈는 15번째의 아이를 출산하다가 사망하였고 그 때 그녀의 나이는 38세였다. 그러나 죽음마저도 샤자한의 사랑을 멈추게 하지는 못했다. 마음이 찢기는 것
샤자한이 통치하던 시기는 무갈제국의 최전성기였고, 무갈제국의 부는 세계 최고였다. 샤자한은 뭄따즈의 영묘를 위해 그 부를 아낌없이 사용했다. 하얀 대리석을 비롯한 각종 석재들은 인도 뿐만 아니라 현재의 흑해지방에서도 수입되었고, 기술자등 중에는 유럽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건설에는 23년이 걸렸고, 동원된 기능공 수는 20,000명이었다.
타즈마할은 햇빛의 각도와 강도에 의해 변화한다. 아침 햇살 속에서 하얀 대리석의 타즈마할은 연한 핑크빛으로 빛나고, 한낮에는 뜨거운 열기에 하얗게 타오르는 듯이 보이며, 해질 무렵에는 주홍색으로 물든다. 또 보름달이 뜨는 밤에는 무서울 정도로 푸른색의 요기를 띈다. 그리고 20층 높이의 하얀 대리석 건물은 사람들을 압도하고 건물의 외부 벽과 내부 벽을 다채로운 색깔의 돌들로 상감한 장식들의 섬세한 아름다움은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연약한 지반위에 타즈마할이 건설됨을 감안하여 바깥쪽으로 기울어지게 세워진 네 개의 첨탑과 정원에 있는 5개의 수로와 연못들 각각에 타즈마할의 전경이 비추는 모습을 보게 되면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유를 알게 된다.
타즈마할의 경이로운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샤자한의 여생은 불행했다. 제국의 부는 거의 탕진되었고, 뭄따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아우랑제브(Aurangzeb)의 반란으로 권력을 상실하게 된다. 타즈마할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있는 아그라(Agra)성에 유폐된 샤자한은 작은 창문을 통해 타즈마할의 모습을 넋놓고 바라보면서 10여 년을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아침 일찍 버스로 5분 정도를 이동하고 다시 에어컨도 되지 않는 고물 자동차로 갈아탄 후 타즈마할에 도착하였다. 문화재 보호를 위하여 경유차는 입장시키지 않고 있었다. 내국인은 500원의 입장료, 우리 외국인들은 18,000원의 입장료. 몇몇은 그 차별성에 분개하였지만, 어쩌랴? 인도에 오면 인도법을 따라야 하는 것을....
타즈마할은 들어오는 길부터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입구에서 검색을 어찌나 철저히 하는지 아무것도 없이 카메라만 들고 입장할 수 있었다. 여자인 우리 입장으로야 샤자한과 뭄따즈 왕비의 사랑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실물의 타즈마할은 너무 아름다웠다. 400년 전의 건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게 깨끗하고 고아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건물과 그 뒤편의 야무나 강과 타즈마할이 조화를 이룬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타즈마할 내부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인도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서양인들도 꽤 눈에 띄었다. 한 가운데 뭄따즈 왕비의 관이 놓이고 왼편에 그의 남편이자 비운의 왕 샤자한의 관이 있었다. 타즈마할의 대칭을 유일하게 벗어나는 구도라 한다. 죽어서야 한 곳에 묻힌 왕과 왕비.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400년 전의 사랑 이야기에 감동하여 수만의 관람객이 이곳을 찾고,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불멸의 사랑, 위대한 사랑의 결정체 속에서 그들은 행복할까? 아님 죽어서조차 편히 쉬지 못하고 뭇 관광객을 맞아야 하는 그리 행복하지 않은 인생들일까?
차가운 대리석에 생명을 불어넣어 그처럼 아름다운 궁전을 지을 수 있었다니, 인도인의 건축 기술에 새삼 존경을 표한다. 바로 옆 건물에서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땅만 파면 나온다는 붉은 색의 사암으로 지어진 건물 안에는 비둘기들이 날아다녔다. 공원 곳곳에 비둘기 천지다. 또 건물 내부의 관리인으로 보이는 사람은 물을 뿌려 물청소를 하고 있었다. 돌이어서 그 견고성을 믿고 하는 일일까? 전 세계에 자랑할만한 문화재를 너무나 함부로 대하는 듯한 그네들을 보니,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한때 번성하던 무갈제국의 수도였던 아그라에서 그 권력의 상징 아그라성으로 갔다. 무갈제국은 16세기에 일단의 이슬람 세력들이 중앙아시아에서 내려와 300여 년간 인도를 다스렸다. 타지마할의 주역 샤자한과 그의 아들 아우랑제브 때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특히 제6대 아우랑제브는 데칸의 이슬람 여러 왕조를 정복하여 최대의 영토를 확장하였으나, 1707년 데칸고원에서 반란을 일으킨 힌두교도들을 평정하러 가다가 아우랑제브 왕이 죽자,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까지 겹쳐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무갈제국의 멸망은 곧 영국의 본격적인 인도의 식민시대를 개막하게 되어 무갈제국은 근대 인도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고 볼 수 있다.
그 무갈제국의 권력의 상징이었던 아그라성은 붉은 색 사암으로 만든 길이 2.5킬로미터에 달하는 성이다. 야무나(Yamuna)강을 따라 만들어졌으며, 전쟁을 위한 견고한 성으로 이중으로 이루어진 굴, 이중으로 이루어진 성벽으로 둘러싸여있다. 외부가 그렇듯 견고하다면 내부는 화려함의 극치로 이루어져있다. 붉은 화강암에 어찌나 섬세하게 조각을 하고, 기교를 부렸는지 인도인들의 예술솜씨에 감탄을 거듭하였다. 멀리서 보면, 나무인 듯 보이다가 가까이서 보면 창틀 하나 하나가 두꺼운 붉은 색 돌이라는 게 놀랍기도 신기하기도 하였다. 문과 창틀 하나도 사각형으로 자르기 쉽게 한 것이 없고, 곡면이나 타원형으로 정성을 들여 400년이나 지난 건물이라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성이었다.
아그라성 2층에서는 야무나 강 너머로 멀리 타지마할이 보였다. 샤자한이 말년에 아들에게 권력을 내어주고 이 성에 유폐되어 생활했다고 전해진다. 자신의 손으로 만든 아내의 묘를 날마다 바라보며 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들이 아버지를 유배하고, 형제간에 피비린내나는 골육상쟁을 벌이는 일은 우리나라에만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도대체 권력이 뭐길래?
오후에는 자이푸르로 이동하였다. 장장 6시간이 걸리는 먼 길이다. 인도인 가이드 ‘씽’과 이야기를 나누며 무료함을 달랬다. 내친 김에 ‘씽’ 이야기를 해 보겠다. ‘씽’은 31살의 잘 생긴 인도 청년이다. 청년이지만 첫째 아이가 11살이나 되는 학부모다. 아들이 한 명이요, 딸은 둘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바라나시 국제학교에 다니는데, 고등학교를 마치면 한국으로 유학을 보낼 꿈을 꾸고있다. 지참금이 없으면 시집을 못 가는 인도에서 딸을 가르칠 생각을 하는 ‘씽’은 확실히 트인 사람이다. 지참금 줄 돈으로 우리 나라 어학원에 등록하여 교육을 시키겠단다.
결혼담도 들려줬다. 자신은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 아래서 자랐다고 한다. 외삼촌이 아버지이자, 어머니 역할을 하였는데 그 외삼촌의 명에 의하여 느닷없이, 이미 날짜 받아둔 다른 사람의 대타로 19살 때 결혼을 했다고 한다. 당연히 신부의 얼굴도 모르는 채 말이다. 일주일이나 신부 근처에도 안가다가 외삼촌의 압력에 못이겨 신부방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어느 날 책을 거꾸로 들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학교 안 다녔냐고 물었더니 ‘학교가 뭐냐?’고 하더랜다.
그런 부인과 아이들을 두고 가이드 생활 10년째란다. 한국인 스님으로부터 한국어를 익힌 후 우리나라 대학부설 어학원에서 2개월을 공부한게 전부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는 7번을 와서 전국 방방곡곡을 훑었다고 한다. 강진도 알고, 고성도 아는데, 순천이나 광양은 모른다고 해서 우리를 섭섭하게 했다. 한국 올 때마다 2, 3개월 배낭여행을 하다가 돈 떨어지면 인도로 돌아간다고 한다. 한국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우리가 고추장 먹을 때마다 함께 고추장 챙겨 먹고, 소주를 잘 먹어서 자신의 별명은 ‘소주 탱크’랜다.
발음은 어눌하지만 이쯤되면 한국어 가이드 실력이 충분하지 않나싶다. 정전이 잦은 인도에서 자신의 부인과 자녀가 걱정되어 30만원짜리 밧데리를 설치했다고 한다. 바라나시의 고급 주택가에 2층짜리 집을 지어 컴퓨터, DVD 등을 갖추고, 인간 보안시스템 -인도의 부유층은 개인 집을 사설경비를 고용하여 지킨다고 한다- 까지 설치했다고 하니, 한국어 배우려는 열풍이 인도에서 부는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나보다.
이방인의 눈으로는 보는 인도에는 일하는 사람보다 노는 사람이 훨씬 많은 곳이었다. 너른 평원이 끝없이 이어져있는데 집들은 너무나 작았다. 겨우 비나 피할 움막 수준을 변치 못하는 집들도 많았다. 논두렁마다 콩을 심고, 한 뼘 땅이라고 남으면 고추나 깻잎이라도 심던 엄마, 아버지를 둔 대한민국에서 사는 우리들 눈에는 그 너른 땅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지 못하고 사는 듯한 인도인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그 원인을 기후에서 찾고싶다.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 나라에서 겨울에 일용할 양식을 미리 준비하지 못하면 굶어죽거나 얼어죽고 만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움직여야 뭔가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무를 해다 쌓고, 장작을 패서 나르고, 추수를 해서 저장하고, 김장을 담그고, 온돌을 만들고....쉼없이 움직이지 않으면 좁은 땅덩이에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우리네 삶에 비해 인도인들은 더운 여름과 조금 덜 더운 여름이 있었을 뿐이니까 아무데나 누우면 그곳이 바로 천당이요, 내세였을 것이다.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듯이, 땀흘려 일하는 수고로움은 안하려 들었을 것이다. 힌두의 철학과 사상이 결합되어 3억3천만개의 신들이 인도인들을 보호하고 지켜줄 것이니까 말이다. 타지마할처럼 세계적인 문화재에 비둘기들이 그리 많은 데도 쫓아내지 못하는 건 비둘기에는 비둘기 신이 있고, 세계문화유산인 카주라호 서군사원에서 함부로 돌아다니는 원숭이떼를 방치하는 건 원숭이 신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데는 할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