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를 타고 암베르성을 오르고, 시티 팰리스 관광(제7일: 8월 22일)
줄은 길었지만 코끼리가 워낙 많다보니 얼마 기다리지 않아 우리도 코끼리를 탈 수 있었다. 이런 코끼리가 100마리가 넘는다고 한다. 두 명이서 한 마리의 코끼리를 탈 수 있게 의자가 놓여있고, 코끼리 머리 위에 몸집이 왜소한 인도인이 코끼리를 조종한다. 오르는 길은 완만한 오르막이었다. 멀리 암베르성의 성곽들이 길게 뻗어있다. 우리같은 여행객들이야 코끼리를 타고 성을 오르는 것 보다는 멀리 성곽을 따라 등산을 하는 게 더 나았으리라는 이야기를 하며 정선생님과 웃었다.
암베르성은 자이푸르 외곽 북쪽 약 10㎞ 떨어진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이 성은 붉은 사암과 흰 대리석을 이용하여 힌두와 이슬람 건축 양식이 잘 조화되어 있는 건축물로, 도시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알현광장이 있다. 내부의 대리석 장식과 창틀은 이슬람 문화의 영향을 받은 무늬들로 장식되어 있다.
그 중 쉬시마할은 왕과 왕비의 침실이었는데 촛불 하나로도 방안 전체가 환해지도록 방 전체가 온통 거울로 장식된 궁전이었다. 1037년부터 700여년간 카츠츠와하 왕조의 수도였던곳인데 당시 너무나 화려하여 종주국인 무갈제국의 황제가 방문시에 덧칠을 하여 화려함을 감추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창문 하나도 과학적으로 설계하여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으나,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게 설계하였다고 한다. 곡선 모양의 너무나 아름다운 창문에 반해 가까이 가 보았더니 그것은 두꺼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족히 3센티미터 이상 되어 보이는 두꺼운 원판의 대리석을 격자무늬나 벌집형으로 파내어서 화려함을 더하였다. 지금은 앞서 이야기한대로 칠이 벗겨지고, 때가 꼬질꼬질 낀 채로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고 있지만, 예전의 그 화려함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거울궁전은 영국인들이 많은 부분을 떼어갔지만, 박 원 선생님의 플래쉬 불빛을 받아 천장까지 환한 빛을 볼 수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는 짚차를 타고 왔다. 위태로운 인도인의 운전 실력을 여기서도 그대로 볼 수 있었는데, 이 짚차에는 윈도우 와이퍼도 백미러도, 사이드 미러도 없었다. 비가 내리는 길을 내려오면서 운전수는 손을 밖으로 내밀어 앞 유리를 닦으면서 운전을 했다. 뒷자리에 탄 우리는 모두 아찔할 수 밖에..... 도대체 어디까지 인도를 봐야 인도의 참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까..헛웃음이 나왔다.
‘바람의 궁전’은 자이푸르 시내 한복판에 있었다. 옛 왕의 여인들은 궁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했기 때문에 갑갑해하는 여인들을 위해 이 바람의 궁전이 지어졌다고 한다. 왕의 여인들은 절대로 외부인에게 얼굴을 보이면 안되기 때문에 이 건물도 밖에서는 안이 안 보이게 철저히 과학적으로 지었다고 한다.
인도 여인들, 특히 왕의 여자들은 외부인에게 얼굴을 보이면 안되었단다. 왕비도 예외는 아니었단다. 옛날 어느 왕비가 전쟁으로 인해 궁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신할 때에 왕은 부하 장군을 시켜 장군을 보호하게 하였는데 갑갑한 왕비는 궁금한 나머지 손을 들어 가마를 조금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단다. 장군을 이를 제지하였고, 일개 장군이 자신을 제지하는 것에 화가 난 왕비는 장군의 명을 따르지 않고 계속 밖을 내다보았다고. 결국 왕비는 장군에 의해 손목이 잘리게 되었다고 한다. 왕은 장군에게 “목을 자르지 왜 손목만 잘랐느냐?”고 했다고 하니, 과거 인도 여인들의 삶을 유추해 볼 수 있겠다.
다음으로는 시티팰리스를 가 보았다. 이전의 왕가의 사람들이 쓰던 옷, 무기,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전시물은 대부분 자이푸르 왕가에서 사용했던 화려한 물품들이었다. 규모가 작은 왕국임에도 이들이 누렸던 호화로움은 대제국의 황제 못지않았다고 한다. 왕비가 입었던 9Km의 사리와 마하라자 사와이 만싱 1세가 입었던 붉은 색 가운은 길이 2m에 너비 1.2m, 무게가 무려 250Kg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가운으로 단순한 전시용이 아니라 실제로 입었던 옷이라고 한다.
박물관 입구를 나와 보니 거대한 은항아리가 놓여있었다. 은항아리는 영국 왕세자였던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배를 타야 했던 마호 싱 2세가 갠지스 강물을 담아가는 도구로 사용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바다를 건너면 자신의 지위(=Caste)를 잃는다는 힌두교인의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는 영국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지만, 영국의 물을 한 방울도 먹지 않는다는 인도인의 자존심의 상징이라고도 하니, 당시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단일 은제품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고 했다.
다행인건 아직도 이 건물엔 왕이 거주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내는 입장료도 왕가의 재산이 되는 거라고 한다. 붉은 색 사암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건물 어딘가에 한때는 천하를 호령했을 왕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하니 묘한 설레임이 일었다. 성을 나오는 길에 앞뒤로 경찰차가 호송하는 왕의 외출을 볼 수 있었다. 너무 빠르게 휙 지나갔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조선시대의 왕가가 생각나서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도 거리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교통 혼잡에 방해가 안 되는 자리가 보인다 싶으면 여지없이 노숙자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비가 와서 땅이 젖은 탓인지 비닐 천막을 쳐 둔 것도 여럿 보였다. 한 곳에서는 밥을 먹는 사람들이 보였다. 부자들이 거리의 사람들을 위하여 자선을 베푸는 거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노숙자나 극빈자를 위하여 탑골공원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나눔의 손길을 베푸는 것으로 알고있다. 어디든 착한 나라 사람은 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