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주라호 빈민 초등학교 방문, 오르챠관광, 아그라로 이동(제5일: 8월 20일)
아침을 먹고 호텔 인근에 있는 초등학교를 방문하였다. 지난번 델리에서는 시설이 잘 갖추어진 최고급 학교를 보았다면 여기서는 인도의 일반적인 시골 학교를 볼 수 있었다. ‘카주라호 설까리 스쿨’이라고 한다. 학생은 190명, 교사 3명에 기능직 1명, 1학년부터 5학년까지의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였다.
운동장이래야 교실 서너 칸의 마당이 전부인데 그나마 여기저기 소의 분비물이 뒹군다. 그 사이를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인 채 아이들 몇이 운동장으로 들어서는 우리는 보고 따라온다. 교실은 달랑 3칸이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한 교실에 눈만 커다란 아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다. 가슴이 울컥해진다. 우리 어렸을 때도 이랬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럼 50년대 6.25전쟁 이후의 나무그늘 교실이 이랬을까?
교실 옆 부엌에서 한 아주머니가 콩 껍질을 벗기고 있다. 콩과 쌀을 약간 섞어서 학교에서 급식을 준다고 한다. 교실에 들어가 보았다. 우리네 교실 2/3정도 크기에 아이들이 앉아있다. 책상도 의자도, 선풍기도 없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교실에 아이들이 애국조회 시간때처럼 줄 맞추어 앉아있다. 칠판 바로 아래에서부터 맨 뒤 벽에까지 빼곡하다. 1학년 교실에는 무려 58명이 이렇게 줄 맞추어 앉아있다. 조금 큰 아이들 교실에는 그보다는 헐렁해보인다.
가이드인 ‘씽’의 말에 의하면 시골에는 이런 학교가 많다고 한다. 마을 유지급에 속하는 사람들 몇이 학교를 세워 운영하다가 점차 소문이 나고 매스컴도 타게 되면 그때서야 정부의 지원금을 일부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학교 역시 10명의 학교 설립자가 교사도 고용하고 관리도 맡는다고 한다.
오르챠(Orcha)은 인도의 숨은 비경 중 하나로 꼽히는 도시로 1531년, 마하라자 루두라 쁘라탑이 세운 분델라 왕조의 수도로 명성을 떨쳤던 곳이다. 현재는 작은 규모의 마을로 축소돼 명맥만 유지하고 있지만, 무갈 제국의 제후국으로서 융성했던 도시였다고 한다.
고성 가는 길 왼 편에 쉬시 마할(Sheesh Mahal)이 있다. 오르챠 유적지 중에서 본 건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제항기르 마할의 부속 건물로 현재는 호텔로 개조하여 쓰인다고 한다. 아래에서 봤을 때는 여기 저기 흉하게 벗겨진 페인트 칠로 인해 드라큐라의 성처럼 보였는데, 막상 올라오니 제법 모습을 갖춘 궁전호텔이다.
사진을 찍고있는 한국인 여학생 두 명을 만났다. 달랑 둘이서 한달째 여행중이랜다. 별로 무서울 것이 없었다고 하는 그네들의 말을 들으면서 신 세대인 그들과 쉰 세대(?)인 우리 사이에 놓인 벽이 실감이 났다. 어딜 가든 우리나라 대학생 배낭객을 볼 수 있었다. 단일민족, 단일언어를 쓰는 우물안 개구리 같은 대한민국을 벗어나 세계 각지로 뻗어가는 우리 젊은이들의 저력을 조그만 체구의 두 여학생에게서 다시 본다. 그네들의 무사귀환을 빌어주며 다시 관광에 나선다.
오르챠 유적 중에서 가장 크고 훌륭하다고 일컬어지는 제항기르 마할(Jehangir Mahal)에 오르는 길은 여러 개의 계단을 통과해야 했다. 한 쪽으로는 울창한 정글이 보이고 다른 한 쪽으로는 오르챠 마을과 유적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백설공주 성처럼 아기자기 하면서 이쁘다. 하지만 가까이에 가보면 쓰레기 더미에 지린내, 여기저기 핀 곰팡이가 그대로 드러난다. 이런 문화재가 우리 나라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500년 역사를 지닌 이 건물을 얼마나 애지중지 했을 것인가? 인도 정부가 문화재 보호에 좀 더 힘을 쏟기를 빌어본다.
오후에는 오르챠에서 3시간 특급열차를 타고 타지마할이 있는 도시, 아그라로 이동한다. 시간에 맞춰 기차역으로 나갔더니, 어쩌랴? 오후 6시 30분 기차는 고무줄을 달았는지 제 시간을 40분이나 넘겨서야 도착했다. 우리가 기차를 못타면 역 입구에서부터 우리 짐을 머리에 인 채 날라주던 포터들도 따라서 기다린다. 우리가 기차에 오르고 짐을 짐칸에 실어 주는 일까지가 포터들의 할 일이기 때문이다.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완전히 동물원의 원숭이 꼴이 되어 버렸다. 빙 둘러서서 눈이 마주쳐도 웃어 주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는다. 외국인을 보아도 안 본 척 슬쩍슬쩍 구경하는 우리랑은 딴판이다. 깜박이지도 않고 우릴 지켜보는 그네들 눈을 마주보기가 미안한건 그 역 주변에도 달랑 종이 한 장이나 보따리를 깔고 노숙하는 사람, 구걸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이 사람들보다 조금 더 여유가 있어서 남의 나라까지 여행와서 헐벗고 굶주리며 구걸하는 풍경을 신기해하며 바라보는 자본주의 근성이 내 안에 있는 건 아닐까? 과연 그네들의 눈에는 낯선 이방인인 우리들이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자못 궁금해졌다.
기차는 쾌적했다. 인도에서 가장 빠르다는 특급 열차답다. 에어컨이 빵빵한 실내, 타고있는 인도인들도 한 눈에 보기에도 상류층이다. 노트북을 가지고 노는 젊은이들도 보인다. 서비스도 좋다. 개인별 찻잔과 음료가 제공된다. 따뜻한 보온병도 있다. 오랜만에 여유를 즐기며 이동할 수 있었다. 하나 둘 불이 켜지기도 하고, 호롱인 듯 불을 밝히는 나지막한 마을을 지나면서 알수 없는 그리움에 사로잡힌다. 좀 더 편해지고, 좀 더 풍요로워지면서 우리가 잃어버리고 놓치고 사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집이 넓어지는 만큼 가족간의 간극도 그만큼 커지는 건 아닌지......떠올랐다 사라지는 상념들로 이 저녁, 나는 인도를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