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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

흔들리는 삶의 기둥, 사랑!

흔들리는 삶의 기둥, 사랑!

공선옥 작가의 소설 영란을 읽고 -

 

 

최근에 구례에 집을 지어 이사한 언니가 있었어. 누구나 꿈을 꾸잖아?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아이들 자라서 밥벌이 할 때쯤 되면 자연과 더불어 개 한 마리 키우고, 텃밭에서 유기농 채소 가꾸며 유유자적 알콩달콩 살아가는 꿈. 아직은 그럴 나이가 안 된 선배가 구례 산동에 황토방까지 딸린 이쁜 집을 지었다기에 드라이브 삼아 구경을 갔더랬어.

 

 

일 미터도 안 되는 낮은 대문 사이로 대문만큼이나 크게 보이는 '봉강이네 집' 누가 초등학교 선생 아니랄까봐 알록달록 색깔 맞춰 써 놓았더라. 봉강이는 그의 출신지 봉강에서 얻어온 개의 이름이라고. 행여 바깥 내다보는 봉강이가 갑갑해 할 까봐 개집 앞면은 통유리로 되어 있더라고. 개 팔자도 그 정도면 롯데호텔급 아니겠니?

 

적당히 구부러진 자연 소나무가 창밖으로 드리워진 새 집 거실에 앉아서 밖을 내다보니 가히 신선이 따로 없더라고. 해충의 습격, 외출 시의 문단속, 언제나 손 봐줘야 하는 조경이나 마당, 내게는 불편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주택의 불편함을 감수하고서 집을 짓는 것이 바로 이런 호사를 누리기 위함인지 바람 통하는 거실에 앉고 보니 살짝 부러움이 일더라고.

 

그 선배 다락방은 더 부러웠어. 편백나무가 둘러친 사방이 책이더라. 하루 3~4시간을 책 읽는데 투자하는 그 언니의 서재에서 이제 서점에서 막 출고된 듯한 책 한 권을 발견했어. 바로 이 책 공선옥의 '영란'이라는 소설. 책이 주는 감동을 좀 더 오래 보관하고자 지는 나는 아주 아주 오랜만에 독후감을 쓰려고 해.

 

공선옥 작가는 곡성 출신이야. 우리랑 가까운 동네에 살아서 더 친근하게 여겨지지? ? 참 잘 써. 인물의 심리 묘사를 어떻게 이렇게 세세히, 살려낼 수 있는지 존경심이 들어. 이 소설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영란'이는 극중에서 편의상 남들이 지어 부르는 이름인데, 그녀. 끝까지 원래 이름이 나오지 않는 희한한 소설이기도 해.

 

영란은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재가와 더불어 아홉 살에 장미향이 스미는 집 대문을 넘어 서울의 변두리로 이사를 가게 돼. 그녀, 부모복이 없었을까? 의붓아버지에 이어 엄마까지 죽음을 맞이하면서 스무 살에 고아가 되어버려. 갈 곳 없어진 그녀에게 그 집의 법적 상속자이자 유일한 가족인 의붓오빠는 넝쿨 장미 심어진 그 집을 너무도 사랑하는 그녀에게 계속 그 집에서 살아도 좋다고 말하지. 그리고 그건 외로웠던 그녀가 스물다섯 무렵 착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면서도 죽 이어지게 돼. 태어난 아들은 자폐아였지만 부부는 서로 사랑하면서 세상의 근심을 잊은 듯 살아가지.

 

아이가 열 살이 되던 해 부부는 강가로 낚시를 가게 되었어. 부자가 낚시하는 동안 산책을 다녀온 그녀 앞에는 싸늘히 식어버린 아들의 시신만이 놓여있게 돼.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그녀의 남편조차 석 달 후 교통사고를 위장한 자살로 저 세상으로 떠나고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의 그녀의 삶이 또 다시 시작돼.

 

아이가 보고프면 빵을 먹고, 자신을 혼자 두고 훌쩍 떠난 남편이 미우면 막걸리를 마시지. 그 무렵 재개발 지구로 엄청나게 땅 값이 오른 그 집 주인인 의붓오빠는 집을 팔았음을 통보하고, 그녀. 막걸리와 빵을 먹으며 초점 잃은 눈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곤 했어.

또 다른 주인공이자 이 글의 화자인 '정섭'은 잘 알려지지 않은 소설가야. 학생운동 하다가 만난 부인과 세상 부러울 것 없이 살아가던 어느 날, 부인이 아닌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그의 가정은 파탄이 나고 말아. 부인은 저주를 퍼부으며 아이를 데리고 독일로 떠나고, 그 남자 사랑조차 잃어버린 후 세상 모두와 담을 쌓고 살아가고 있었어. 기러기 아빠 삼 년 만에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친구의 부음을 듣던 날. 그녀 '영란'의 전화를 받게 돼. 영란의 남편이 출판업자라고 이야기 했던가? 작은 출판업을 하던 영란의 남편이 유일하게 인세를 지불하지 못한 이가 바로 정섭이었던 거야. 아주 아주 먼 길을 떠나기로 작정한 그녀가 이승에서의 남은 빚을 하나씩 계산하다가 마지막까지 남은 정섭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하기 위하여 전화를 했던 거지.

 

정섭 그 남자. 귀찮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마음으로 그녀 영란을 만났는데 멍한 그녀의 표정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본 것일까? 즉흥적으로 세상을 떠난 친구의 문상을 가는 길에 영란을 데려가게 돼. 어디냐고? 바로 전라도 목포. 그러고 보면 영란이라는 이름은 목포를 상징하는 이름인 듯 해. 목포는 민어회의 고장이고, 민어회를 대표하는 횟집이 여주인공의 이름과 같다는 걸 얼마 후에야 알았거든.

 

이 소설은 희망을 잃어버리고 세상 끝까지 밀려버린 두 남녀의 희망찾기야. 구수하고 맛깔진 전라도 사투리에 홍어, 간재미회 등의 음식까지 버무러져서 목포를 제대로 그려냈어. 두 남녀의 희망찾기라고 해서 두 남녀가 이러쿵 저러쿵 하는 건 아니야. 데려간 건 정섭이었으나, 친구의 죽음으로 마음이 심란했던 정섭은 그녀가 없어져 버린 줄도 모르고 서울로 돌아오게 돼. 나중에 영란을 찾아 목포로 내려오기는 하지만 두 남녀는 소설이 끝나는 동안 한 번도 다시 만나지 못해. 정섭이도 영란이도, 둘은 서로가 잠깐 잠깐 들르는 거리에서, 횟집에서 간발의 차이로 엇갈리게 돼. 영란은 영란대로 정섭은 정섭대로 목포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들과 부대끼고 만나면서 그 속에 서려있는 상처없는 영혼은 한 명도 없다는 데서 스스로 위안을 얻고 일어서게 되는 이야기야.

 

흔들리게 하는 것도 '사랑'이고 흔들리는 삶에서 다시 기둥이 되어 주는 것도 '사랑'이라는....누구나 알고 있는 그 말이 이 소설을 통해 다시 한번 감동으로 다가온 소설이야. 공지영씨처럼 화려하지도 않고-개인적으로 나는 공지영 작가도 좋아해. 화려한 배경과 미모, 작품, 또 사회현상에 목소리를 낼 줄 아는 그 지성도 좋아하지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그녀의 삶도 좋아해. 3번 결혼해서 각각 성이 다른 아이 셋을 키우는 그녀를 보면서 적어도 그녀는 자기 삶에 충실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곤 해. 그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해 사랑했다는 반증 아니겠니? '즐거운 나의 집' 이라는 책을 보고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그녀지만, 나는 그녀의 그 치열함에 박수를 치자고 마음먹었단다- 신경숙씨처럼 다수의 팬을 갖지도 못한 수수한 보통 여자, 어찌보면 촌스럽게만 보이는 공선옥, 그녀의 어느 곳에 이런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는 자질을 숨겨두었는지....나는 그녀를 질투해.

모처럼 눈물이 있는 감동적인 소설을 읽었어. '오지리에 두고 온 서른 살'이라는 소설을 보고 진즉 반하기는 했지만, 지금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의 목록에 이름을 올려두기로 했어. 그녀는 그럴만한 자격이 충분한 여자였어. 나는 기꺼이 공선옥 작가의 팬이 되어 보겠어. (2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