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시 산림교육원 도서관에서 빌려읽은 책
나와 방을 같이 쓰는 선생님은 종달새형이다. 열 시가 되면 어김없이 취침을 한다. 나는 머리위 전등을 켜고 책을 읽는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책장 넘기는 소리, 뒤척이는 소리가 난다. 미안하다. 그러나 잠이 안오는걸 나 또한 어쩔 수 없다.
그제와 어제 이틀에 걸쳐서 다 읽은 책. 바로 '꽃같은 시절'이다. 공선옥 씨는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중 한 명이다. 곡성출신이라서 이 작가가 쓰는 전라도 사투리나 문화가 너무 잘 이해가 되어서 좋고, 낮은 곳의 삶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는 작가의 마음씀이 곱다. 나랑 동시대를 살아낸 사람이기에 더 마음이 간다. 지난번에 이 작가가 목포를 배경으로 쓴 소설 '영란'도 아주 감동으로 읽은 기억이 있다. 이번 작품 역시 이런 내 기대를 한치도 어금남이 없이 충족시켜 준다.
처음에 제목을 보고는 젊은이들의 이야긴 줄 알았다. 출판사가 창비인 걸 보고는 사회비평적인 내용일 수 있겠다 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노인들의 이야기였고, 힘없는 약자들이 억눌리고 당하는 부당한 사회현실을 그저 담당히, 이 작가 특유의 감성적이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잊고있던 전라도 사투리에 소리내어 읽어도 보고, 주인공의 심정 따라 부당한 현실에 화가나기도, 꽃같은 시절을 살아낸 할매들의 이야기에 눈물이 찔끔 나기도 했다.
마을 입구에 있는 오명순의 돌담이 우리는 좋았다. 먼 데서 돌아와 마을에 들어서면 맨 먼저 그 오래돼서 이끼 자욱한 돌담이 맞아주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그 낮은 돌담 너머로 오명수네 밥 짓는 연기가 푸실푸실 새어나오는 것이 좋았고, 먹을 것을 넘겨주는 것이 우리는 좋았다, 그 좋은 것을 부숴버리는 사나운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나는 그 사나운 마음이 어디서 왔는지를 알 수 없어 무서웠다. 오명순은 서러워 울었다. 서러워 운다고 해서 눈물을 철철 흘리는 것도 사니다. 그저 언제나 그렇듯, 한숨을 쉬듯이, 육자배기 가락에 사설 한 자락을 풀다 보면 막힌 가슴이 좀 뚫리는 것이다,
시상은 과부집에 꽃 폈다고 숭을 보네 오월이라 능소화는 홀애비집에나 과부집에나 몽실몽실 핀다네 속도 없이 핀다네 시상은 과부가 장에 간다 숭을 보네 삼월이라 봄바람은 홀애비 집에나 과부집에나 살랑살랑 분다네 속도 없이 분다네
오남순의 사설을 조난남이 받았다.
남원운봉 목기장시야 꽃을 두고도 그냥 가냐 나도야 이 재 넘어가서 해당화를 숭거놓고 피었는가 보러 갈란다 보성미력 옹구장시야 짓고 가소 짓고 가소 이름이나 짓고 가소 딴 디 가서 해찰 말로 일 오소 이리 오소 오봉산에 꽃 보드끼 나를 보러 이리 오소
달이 둥실 떠올랐다. 오명순네 다무락이 달처럼 둥실, 그 이쁜 자태를 드러냈다.(139쪽)
"어이, 한사코 모란꽃맹이로 이삐고 존 것만 생각허소이. 내가 얏닐곱살 때 울 오무니가 애기를 낳다가 돌아가싰거등. 할머이가 방문을 탁 열고 나옴서, 아이, 느그 어매 죽어부렀다, 허등만. 죽는 것이 뭣인지는 몰라도 어쩐지 슬프제이. 막연허게 슬픈게 말레(마루)에 우두근히 앉아서 다무락 옆에 모란꽃 벙그러진 것만 가만히 보고 앉았어. 모란꽃이 하도 이뻐서 그것 보니라고 내가 어매 죽은 것을 깜빡 잊어묵었어. 그러니, 그때 모란꽃같이 이삔 것이 한 태기도 없었으면 얼매나 더 설워야? 그렇게 자네도 맘이 힘들수록에 한사코 모란꽃맹이로 이삔 것만 생각하소이."(193쪽)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어여....
출연자가 부르는 노래 중에 유독 남자라는 이유로 라는 구절이 가슴에 와 박힌다. 남자이기 때문에 울 수는 없다. 울어서는 안된다, 안된다, 입술을 깨무는데, 동네 노인들이 '천불나 못살겠다'고 했듯이, 철수 가슴 또한 자신에 대한 분노로 들끓어오른다. 열희가 노인들 '초롱초롱한'눈이 자기만 바라보고 있다고 눈물을 글썽일 때, 세상에서 가장 순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싸움을 한다며 짠한 표정을 지을 때, 거미를 죽여서 죄로 갈 것 같다는 할머니가 다 있더라며 눈을 반짝일 때, 내가 지금 거미 한 마리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과 함깨하고 있다고, 한 번도 험하지 않는 세월이 없었지만 그 험한 세월 중에 그래도 지금이 가장 꽃시절이라며 함박꽃같이 웃는 사람들하고 같이 있다고, 그러니 나는 얼마나 복받은 사람이냐고, 힘들긴 하지만 또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인지도 모른다며 방긋 미소지을 때, 길가에 핀 코스모스를 밝고는 "아이갸, 이쁜 꽃을 볼바부렀네" 하더라고, 얼굴 붉어지더라고, 꽃한테 미안해하더라고, 그래서 폴짝 뛰더라고, 폴짝 뛴 할머니 흉내내느라 저도 폴짝 뛰며 어린애처럼 웃던 아내의 그 말들을 왜 다 허투루 듣고 말았을까. 귀기둥리고 새겨듣지는 못할망정, 왜 그렇게 생각없는 말들을 내뱉었던 것일까. 목구멍 안에서 또 한 번 거대한 파도가 인다.(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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