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11일 1쇄 발행
2017년 3월 29일 1판 26쇄 발행
<말의 품격>>과 더불어 교보문과 집계 베스트셀러 작가 입지를 굳히고 있는 이기주 작가.
지난 6월 판매량의 29.2%가 이기주 작가의 책일 정도로 이 작가에 대한 독자의 반응이 뜨겁다고 한다. 짧고 간결한 에세이 속에 생각해 볼 거리가 많이 있어 인상적인 부분을 옮겨 적어 본다.
120쪽
사랑이란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여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어떤 학자는 사랑이 살다의 명사형일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나는 생각할 사와 헤아림을 의미하는 한자 양을 조합한 '사량"에서 사랑이 유래했다는 설을 가장 선호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을 하면 상대에 대한 생각을 감히 떨칠 수 없다. 상대의 모든 것을 탐험하려 든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상대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우주, 하나의 시대이므로......
으로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의 없다는 건 가끔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지만.
"글은 엉덩히 힘으로 쓰는 것이다."
작가나 기자처럼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자주 하는 말이다. 약간의 허세가 셖여 있기는 하지만 충분히 일리가 있는 얘기다. 타고난 천품으로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의 없다는 건 가끔 있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지만.
상당수 작가는 시간과 드잡이를 해가며 '머릿속 모티터'에 쓰고 지우기를 거듭한다. 단어를 고르고, 고치고, 꿰매는 일을 되풀이한다. 채 경험하지 않았거나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문장으로 이야기하려면 그 수밖에 없다. 덜어낼 것도 보탤 것도 없는 적확한 문장을 쓰고야 말겠다는 다짐이 지면에 스며들 때까지 펜을 들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벼랑 끝까지 가보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혹은 벼랑 근처까지 갔다가 자신만의 깨달음을 안고 돌아오는 사람이거나.
160쪽
흠, 그럴 리 없다. 살다 보면 프로츠럼 임해야 하는 순간이 있고 아마추어처럼 즐기면 그만인 때도 있다.
프로가 되는 것보다, 프로처럼 달려들지 아마추어처럼 즐길지를 구분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 싶다. 프로가 되는 노력은 그다음 단계에서 해도 된다.
이건 꽤 중요한 이야기다. 프로처럼 처리해야 하는 일을 아마추어처럼 하면 욕을 먹기 쉽고, 아마추어처럼 즐겨야 하는 일에 프로처럼 목숨을 걸다가는 정말 목숨을 잃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내몰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169쪽
진짜 소중한 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가끔은 되살펴야 하는지 모른다. 소란스러운 것에만 집착하느라, 모든 걸 삐딱하게 바라보느라 정작 가치 있는 풍경을 바라보지 못한 채 사는 건 아닌지, 가슴을 쿵 내려 앉게 만드는 그 무엇을 발견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눈을 가릴 채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191쪽
국어사전에서 '중독'을 찾으면, 무언가를 지나치게 복용한 결과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상태, 어떤 사상이나 사물에 젖어 버려 정상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라고 기술돼 있다.
중독, 나쁜 거 맞아. 중독은 독이다. 지나치면 목숨까지 위태롭게 만드는 독, 그래서 다들 중독에서 벗어자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무언가에 취하지 않으면, 무언가에 홀리지 않으면 별 재미가 없는 게 인생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때론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애착을 갖고 무언가에 깊이 있게 파고 들 때 팍팍한 삶을 견딜 수 있다.
202쪽
'앎'은 '퇴적'과 '침식'을 동시에 당한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알게 되는 지식이 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깎이고 떨어져 나가는 지식도 많다. 공부는 끝이 없다는 뻔한 말이 새삼 무겁게 다가오는 경우도 많다.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특히 그렇다.
203쪽
책 쓰기는 문장을 정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른 아침 머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 깊은 밤 방 안에 홀로 있을 때 느낀 상념, 점심을 먹고 커피를 들이켜며 중얼거린 말에서 가치 없는 표현을 걸러낸 다음 중요한 고갱이를 문장으로 옮기고, 다시 발효와 숙성을 거쳐 조심스레 종이 위에 활자로 펼쳐놓는 일이 글쓰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거뭇한 키보드에서 손가락을 떼는 순간뿐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도 유종의 미는 중요하다.
모든 사귐은 하나의 여정이다.
마지막 순간이 두 사람의 추억을 지배한다.
연인과 이별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였나 봐, 아무튼 잘 지내....."라고 마지막 문자를 보냈더니 "ㅇㅋ"답문을 받았다는 지인이 있다.
나는 이 얘기를 듣는 순간 잡다한 장르가 뒤죽박죽 뒤엉켜 있는 영화 한 편을 관람한 느낌이 들었다. 희극적인 요소가 다분한 멜로인지, 비극적 요소가 버무러진 코미디인지 헷갈렸다.
시작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 아니, 때론 훨씬 더 중요하다. 당사자엑 알려지는 것과 당사자에게 알리는 건, 큰 차이가 있다.
시작만큼 중요한 게 마무리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240쪽
혹자는 감정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강변할지 모르지만 그건 진짜 사는 게 아닐 것이다. 가짜 감정을 잠깐 대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여는 반환을 전제로 한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반납하듯 반드시 돌려줘야 한다.
이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영화 '봄날은 간다'의 상우는 몸서리치며 절규했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질문 같기도 하고 탄식 비슷하기도 한 이 문장을 듣는 순간 우린 피식 웃게 된다.
사랑을 겪어본 사람은 안다. 진한 사랑일수록 그 그림자도 짙다는 사실을, 태양처럼 찬란하게 빛나던 사랑도 시간속에 스러진다는 것을, 설령 사랑이 변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사람이 변하고 만다는 것을.
감정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이모션 emotion의 어원은 라틴어 모베레movere다. '움직인다'는 뜻이다. 감정은 멈추어 있지 않고 자세와 자리를 바꿔 가며 매 순간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말한다. 이별 또한 사랑의 전개 과정이라고. 사랑이 기승전결을 거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어쩌면 우린 사랑이 한결같을 거란 믿음에서 벗어나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쇠퇴와 소멸을 감지할 때 지난 사랑의 생채기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고, 새롭게 다가온 사랑 앞에서 용기를 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293쪽
꽃은 향기로 말한다. 봄꽃은 진한 향기를 풀풀 내뿜으며 벌과 나비와 상춘객을 유혹한다. 향기의 매력은 퍼짐에 있다. 향기로운 꽃 내음은 바람에 실려 백 리까지 퍼져 나간다. 그래서 화향백리하 한다.
다만 꽃향이가 아무리 진하고 한들 그윽한 사람 향기에 비할 순 없다. 깊이 있는 사람은 묵직한 향기를 남긴다. 가까이 있을 때는 모른다. 향기의 주인이 곁을 떠날 즈음 그 사람의 향기, 인향이 밀려온다. 사람 향기는 그리움과 같아서 만 리를 가고도 남는다. 그래서 인향만리라 한다.
2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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