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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

쓸쓸하고 찬란하神 도깨비1, 2/김은숙 극본/스토리컬쳐 김수연/

작년에 드라마로 유명했던 도깨비가 책으로 나왔기에 심심풀이 땅콩으로 읽었다. 간간히 보아선지 책을 읽으면서 '아, 공유가 저랬겠구나'이런 식으로 감정이입이 되어서 좀 그랬다. ㅎㅎ 잘 만든 책이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져서 보면 너무나 심심했다. 책에 담은 내용을 1/10도 담지 못한 듯 하여 안타까울 때가 있었다. 이 책은 드라마 히트에 힘입어 나온 책인지 소설의 장면 장면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역시 김은숙 작가 작품이야" 감탄이 나오는 맛깔스런 대사 덕에 읽는 즐거움이 더했다. 물론 드라마로 본 내용이 생생이 되새겨져서 1권에서는 거의 흥미를 느끼지 못하다가 드라마를 본 바 없는 2권에서는 좀 더 집중하며 읽었다는 점이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다.


133쪽

도깨비가 전생이며 지금 살아가는 모든 순간들이 잊히지 않아 괴롭다면, 저승은 그 반대였다. 모든 순간의 기억이 없었다. 대체로 전생에 씻지 못할 큰 죄가 있는 이들이 죽어 승천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지옥불에 떨어지지 않은 채 저승사자가 되었다 . 저승사자가 되어 망자를 인도하는 고단한 일을 하며 죄를 덜어내는 것이다. 두 괴로움은 전혀 다른 것이면서도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다른 평범한 사람은 감당하지 못할 괴로움.



        사랑의 물리학


질량의 크기는 부피와 비례하지 않는다.


제비꽃같이 조그마한 그 계집애가

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그 계집애가

지구보다 더 큰 질량으로 나를 끌어당긴다


순간, 나는

뉴턴의 사과처럼

사정없이 그녀에게로 굴러 떨어졌다

쿵 소리를 내며, 쿵쿵 소리를 내며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

첫사랑이었다


253쪽

"자, 그럼 이제 예뻐져 보십시다. 마지막으로 남기실 말은?"

지은탁, 도깨비가 소리 내지 않고 가만히 은탁의 이름을 불렀다. 은탁은 맑은 눈으로 도깨비를 보고 있었다. 도깨비는 천천히 입을 뗐다.

"너와 함께한 모든 시간들이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깊고도 낮은 울림이 은탁의 심장에 닿았다.



"알바생, 너 혹시 전생 뭐 그런 거 믿니?"

"....네."

"믿어?"

"인간에겐 네 번의 생이 있대요. 씨 뿌리는 생, 뿌린 씨에 물 주는 생, 물 준 씨를 수확하는 생, 수확한 것을 쓰는 생. 그렇게 네 번의 생이 있다는 건 전생도 있고 환생도 있다는 거 아닐까요? 사장님이나 저나 이번 생이 몇 번째 생인진 모르겠지만요."


252쪽

공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도깨비와 닿았던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서 그가 사라지고 있었다. 기억들은 모두 비에 씻겨 나가기 시작했다. 도깨비를 기억할 만한 모든 흔적들이 불꽃으로 변하여 타들어갔다.


분수대 앞에 앉아 있던, 자신을 보고 웃어주던 남자가 사라지고 있었다. 따뜻하게 웃던 남자가 사라지고 있었다. 은탁은 가방을 향해 기듯 뛰듯 달려갔다. 사라지지마, 사라지지마.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집념이 은탁을 움직이게 했다. 미친 사람처럼 가방을 헤집어 노트를 꺼냈다. 펜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며 은탁은 글씨를 적어 나갔다.


기억해, 기억해야 해. 그 사람 이름은 김신이야.

키가 크고 웃을 때 슬퍼.

비로 올 거야, 첫눈으로 올 거야. 약속을 지킬 거야.

기억해, 기억해야 해, 넌 그사람의 신부야.



284쪽

부디 다음 생에서는 기다림은 짧고, 만남은 긴 인연으로, 핑계 없이도 만날 수 있는 얼굴로, 이 세상 단 하나뿐인 간절한 이름으로, 우연히 마주치면 달려가 인사하는 사이로, 언제나 정답인 사랑으로, 그렇게 만날 수 있길 바랐다.

불규칙한 호흡과 함께 잘 참고 있던 울음이 터졌다. 어디에도 말할 수 없는 슬픔이 파고들었다.


349쪽

누이도, 벗도, 신부도 떠나고, 홀로 남겨진 도깨비는 메밀밭을 거닐었다. 게절은 수없이 바뀌었다. 은탁이 남기고 간 빨간 목도리를 하기도, 은탁과 밟았던 단풍잎을 밟기도, 눈을 맞기도, 비를 내리기도 하면서 도깨비는 계속해서 시간을 걸어 나갔다. 그 끝에 두 번째 생의 은탁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면서. 어떤 모습으로 올지, 어디서 올지 몰라 늘 긴장되었으며 기대되었다.


고려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러했듯이 도깨비는 수십년에 한 번씩은 사는 곳을 옮겼다. 익숙한 삶이었다. 곁에 있는 사람도 변했다. 어리고 철없던 덕화도 자신의 할아버지가 그러했듯 노인이 되어 제 손자를 도개비에서 소개했다. 누군가의 죽음이, 슬픔이 익숙해지지 않은 채 도깨비에게 머물렀고, 늘 쓸쓸하였으나 은탁을 기다리는 삶이었기에 은탁 없이도 게속해서 찬란했다.


덕화의 손자가 자라 노인이 되어 그의 곁에 있었다. 겉옷을 챙겨 나갈 채비를 하는 도깨비를 보며 머리가 희끗한 그가 물었다.

"어디 가십니까, 나으리."

"산책을 좀 할까 하여."

"저기 큰길 쪽은 피하십시오. 한국에서 학생들이 여행을 와 좀 시그럽습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도깨비는 호텔을 나섰다.


프라하도, 파리도 좋았지만 퀘백 호텔은 그가 가장 머물기 좋아하는 이국땅이었다. 은탁과의 추억이 가장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탁 트인 평원의 풍경은 은탁이 있었을 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모비가 조금 더 낡았고, 조금 더 세워졌을 뿐.


자신의 낡은 묘비에 기대앉아 도깨비는 책을 펼쳐들고 한장씩 책장을 넘겼다. 살랑이는 바람이 볼을 간지렵혔다. 책엣 시선을 떼 고개들 들어 풍경을 바라보았다. 언제 보아도 매일 조금씩 다른 구름의 모양이, 해가 지는 하늘의 색이 아름다웠다. 아름다워서, 도깨비의 생에 가장 아름다운 것들이 그리워졌다.



이만하면 달달한 연애 소설로는 그만이다.

차라리 드라마를 보지 않았더라면 더 재미있었겠지?

<태양의 남쪽> <파리의 연인> <프라하의 연인> <연인> <온에어> <시티홀> <시크릿가든>

<신사의 품격> <상속자들> <태양의 후예> 등

이 시대 최고의 드라마 히트작 제조기 김은숙 작가의 작품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