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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풍경/생태수도 순천

백제시대 발자취 검단산성을 찾아서


 


2016년 11월 20일(일) 오후 3시


11월의 날씨치고는 너무나 따뜻하고 온화한 일요일 오후

광양문화연구회 회원들이 검단산성으로 답사를 다녀왔다.

오늘의 답사 인원은 6명

광양읍 국민은행 앞에서 만나 차량 두대로 옮겨 타고 순천시 해룡면 성산리 피봉산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 검단산성으로 향했다.

별도의 주차 공간이 없어 마침 일요일이라 사람이 없는 검단산성 앞 장애인 협회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지키고 있던 두 마리 개가 꼭 잡아 먹을 듯이 대든다.

용감한 개들이야.

그래봤자 너는 끈에 묶인 신세...

그러나 너 임무에는 참 충실하구나.


 

 

 

 

오르는 길은 15분 남짓이지만 꽤 경사가 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듯 낙엽이 수북히 쌓여 있어 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해 준다.


 


 


이 산성은

1598년 정유재란 때 조선과 명의 연합군이 신성리의 왜성에 주둔한 고니시(소서행장)의

왜군과 대진하여 공방전을 펼친 곳이어서 조선산성, 또는 한성이나 띠두르봉 등으로 불렸다고 한다.

여기서 1.5키로 떨어진 곳에 <순천왜성> 이 있어 그곳과 대비되는 조선의 성이라 하여

이렇게 부른 모양이다.


그런데 1996년 순천대학교 박물관의 정밀 조사와 1998~1999년 2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6세기 말~7세기 전반 경에 걸쳐 축성된 백제시대의 산성임이 밝혀졌다.

위의 돌 무더기는 그 당시,

즉 백제시대의 기와장이라 한다.

각각의 기왓장마다 조금씩 다른 무늬가 있다.

천 년 전 유물을 이렇게 가까이서 만져보고 구경할 수 있어서

좀 신기했다.

 

성곽의 규모는 전체 길이 약 430미터, 외벽의 높이는 1~3미터가 남았으나

당초의 높이는 4~6미터로 추정된다고 한다.

산성의 형식은 전형적인 테뫼식 산성(산 봉우리에다가 마치 테를 두른 것처럼 산성을 쌓은 형식)으로

전라도 지방에는 이런 테뫼식 산성이 많이 보인다고 한다.

 

 

 해발 138.4미터 밖에 되지 않는 아주 낮은 산인데

산성 정상에 오르니 사방 팔방이 다 보였다.

 

 


 

 

 

대형우물도 두 곳이 있다. 우물이 있어서 신기하다 했더니

광양 마로산성에는 5개나 있다고 하여 놀랐다.

광양 마로산성으로 아이들 데리고 소풍도 다녀왔는데

헛봤는지 본 기억이 없다.

이 대형우물이 있는 곳은 산성의 서쪽으로 산성에서 가장 낮은 곳이라 한다.

빗물이 이곳으로 흘러들고 그것을 모아 비상시의 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오늘은 하루살이들의 천국이 되어 있네....



 

 

기검단산성은 정유재란 때 조명연합 육상군의 지휘부가 주둔했던 임란 전적지로 유명한 곳이다.

이 전튜는 1598년 9월부터 2개월간 이 산성에서 동쪽으로 약 2.7키로미터 떨어진

왜성에 전년부터 철옹의 요새를 쌓아 호남공략의 발판을 삼았던 소서행장과 대치하여

치열한 공방을 치른 곳이다.

이 전투를 왜교성 전투를 <왜교성 전투>라고 하며, 조선, 명나라, 일본 삼국의 수륙군이 얽혀

격전을 펼친 뒤 노량해전을 끝으로 막을 내린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싸움을 말한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육상군은 명의 제독 유정의 군사와 조선의 도원수 권율의 관군 및

전라도 의병이 연합전선을 구축하여 검단산성을 중심으로 포진한 후,

장도와 송도에 진영을 베푼 명의 도독 진린, 통제사 이순신의 연합 함대와 서로 응하여

마침내 왜군을 격퇴한 전투였다.

검단산성은 정유재란의 전적지로서의 중요성이 인정되어

1995년 전라남도 지방기념물 제157호로 지정되었으며,

정식 발굴 이후 1999년 사적 제418호로 승격되었다.


순천 신대 메가박스 영화관에서 5분도 걸리지 않는곳에 검단산성이 있는데도

이 산성의 중요도나 가치를 지금까지는 몰랐었다.

옛 것을 통해 새 것을 배운다고 답사를 통해 또 새로운 것을 배운 유익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