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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풍경/벌교를 기록하다

순국100주기 홍암나철선생 추모제

 

홍암 나철 선생님 추모제에 다녀왔다.

<독립운동의 아버지, 국학운동의 선구자>지만

실제로는 대종교의 창시자 정도로 알고 있는 홍암 나철 선생의 추모제가 있었다.

오늘 오전 11시 총 사업비 76억여 원을 들여 만들어진 홍암 나철 선생 기념관 개관식 겸

추모제가 열린 것이다.


기념관은


제1관 - 홍암관(출생과 성장, 독립운동 활동, 대종교 중광발전, 순명)


제2관- 대종교 독립운동관(항일무장투쟁, 임오교변, 환국)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람시간은 동절기는 오후 5시까지

하절기는 오후 6시까지

관럄료는 무료이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에 사람들의 옷차림은 한겨울이 되었고,

바람은 시베리아 찬바람이 불어오는데

각계각층의 헌화와 분향, 그리고 추모사가 어찌나 길게 하는지

한 시간 여를 바람 속에 앉아 있었다.



 

홍암 나철 선생은 단기 4196(서기 1863년) 12월 2일 전남 보성군 벌교읍 칠동리 금곡 마을에서

나용집 선생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홍암, 본명은 인영, 본관은 나주이다.


5살때 호남ㅇ서 이름난 유학의 대가 왕석보 선생에게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29세의 나이에

대과에 급제하여 승정원과 승문원 요직을 거쳤다.


1905년 오기호, 이기, 홍필주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천황에서

'동양평화를 위한 의견서'를 제출하였으나 응답이 없자 3일간의 단식투쟁을 하는 등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 후 2차, 3차 항임외교를 폈으나 실패하고 돌아왔다.


1907년 45세때 을사오적(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권중헌, 이근택) 처단을 위해

을사오적 암살단을 결성하여 실행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10년 형을 선고받아 신안군 지도읍에 유배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사면되었다.


1909년 47세 때 일제의 눈을 피해 민족정기를 바로세우고 독립운동을 원활히 하기 위해

단군교를 중광하여 본격적인 정신 계몽운동 차원에서의 독립운동을 펼쳤다.

이후 대종교 총본사를 서울에서 만주 화룡현 청파로 마을로 이전했고,

이후 여기는 30여년간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활용되었다.


53세때 일제는 종교 통제안을 발표하고 대종료를 종교단체를 가장한 항일독립운동단체로 규정하고

탄압을 시작하였다. 1916년 8월 15일 그의 나이 54세 때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한 오리의 목숨을 끊음은 천하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하는 순명삼조를 유서로 남기고

스스로 숨을 끊는 폐기법으로 순국하셨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선생의 두 아들 (나정련, 나정문)도 건국훈장 추서되었다.


 

돌아오는 길,

바로 옆 골목에 있는 나철 선생의 생가를 둘러보았다.

오늘 같은 날은 좀 열어놓을 일이건만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다행히도 바로 옆 조그만 길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2006년 추모사업을 거쳐 복원하였다는 생가는 햇살이 가득하였다.

당시 꽤 부유한 집안이었음을 보여주듯

위용을 갖춘 기와집 두 채가 앞 뒤로 나란히 있었다.

앞 건물은 추진위원회, 뒷건물은 분향소로 쓰이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내 가족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은 종종 보지만

모르는 타인이나 신념에 따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의로움을 위해 개인의 영달과 안녕을 버리고 국가독립을 위해 헌신하였지만

그동안 평가절하되어왔던 나철 선생에 대한 재조명의 기회가 될 것으로 보여진다.

 

잘 알지 못하였던 나철 선생의 일대기를 알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부디 이렇게 돈을 많이 들여 건설한 기념관이 그 취지와 목적에 맞게

후세에게 배움의 시간이 되길 바라며

학생들의 체험학습으로도 많이 활용되어

사장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 끈질긴 생명력을 어이할꼬.....

너의 이름은 들꽃....

너의 생명력에 경의를 표하노라....


아래 사진은 청명한 하늘에 딱 하나 남은 붉은 홍시가 인상적이라 찍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