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머물 것 같은 회천을 떠나와서 벌교 카테고리를 만든 다는 것이
괜히 회천에 대한 배신처럼 여겨졌다.
아무도 나에게 배신자라고 말하지 않았지만, 아름다운 회천의 풍광을 주로 쓰던 이곳에
아직은 낯선 벌교를 쓴다는 것이. 미안했다.
이제 한 달도 넘었고 그리운 회천은 제가 사는 곳에서 너무 멀리 있는데....
하여 오늘부터는 이 곳 벌교의 풍광을 이곳에 기록하려고 한다.
아이들과 홍교 체험학습을 갔다.
학교에서 걸어서 500미터쯤 가면 나온다.
그런데 늘 차만 타고 지나갔기에 이 위를 걸어보는 건 오늘 처음이다.
예전 순천 벽지학교 외서초에 근무할 때도 벌교를 지나갔었기에 홍교는 늘 보던 풍경이었다.
홍교는 벌교 포구를 가로지르는 다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다리로 세 칸의 무지개형 돌다리이다. 원래는 강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뗏목다리가 있었는데, 조선 영조 5년(서기 1729년)에 순천 선암사의 승려인 초안과 습성 두 선사가 지금의 홍교를 건립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홍교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워 보물 제 304호에 지정되어 있다.(보성군이 만든 벌교이야기에서 옮겨 씀)
왼쪽 세 칸은 오래전에 만든 다리이고
오른쪽은 이어 붙인 모양새다.
벌교(筏橋 : 뗏목으로 잇달아 높은 다리. 우리말 큰사전, 한글학회 지음)라는 지명은 다름 아닌 '뗏목다리'로써 국어사전에 나와 있는 보통명사이다. 보통명사가 고유명사로 바뀌어 지명이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므로 뗏목다리를 대신하고 있는 이 홍교는 벌교의 상징일 수 밖에 없다. 소설에서도 이 근원성을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여러 사건을 통해서 그 구체성을 은밀하게 보여주고 있다.(벌교이야기에서 옮겨 적다)
김범우는 홍교는 건너다가 중간쯤에서 멈추어 섰다.....그러니까 낙안벌을 보듬듯이 하고 있는 징광산이나 금산은 태백산맥이란 거대한 나무의 맨 끝 가지에 붙어 있는 하나씩의 앞사귀인 셈이었다.(태백산맥 1권 257쪽)
당시로서는 꽤나 넓은 돌다리였겠다.
지금은 양 쪽 난간이 없어서 아이들이 건널 때 좀 무서워 보였다.
다리 아래 원래는 용머리 모양의 이것이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무려 한 달 전에 다녀온 것을 이제야 올리기에 아직은 갈대가 덜 피었다.
새로 만든 다리가 편하긴 하겠으나, 예술성과 조형미에서는 떨어지는 느낌이다.
태백산맥의 공간적 배경이 된 이곳 벌교.
청년단도, 부용산도, 중도방죽도, 회정리교회도 서서히 다녀볼 참이다.
또 이곳에 정붙이고 잘 살아가야겠지.
어디든 정붙이고 살면 고향.....
그리운 사람들이 사는 땅, 회천은 마음속 고향으로 마음 한구석에 꼭꼭 숨겨두고 말이다.
'일상의 풍경 > 벌교를 기록하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정래 태백산맥 문학관 (0) | 2016.11.15 |
---|---|
작가 조정래 벽화 (0) | 2016.11.15 |
삼화목공소의 풍경 (0) | 2016.11.13 |
순국100주기 홍암나철선생 추모제 (0) | 2016.11.02 |
추억이 그립거든 득량역으로 오세요 (0) | 2016.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