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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삶과 문학

특별한 선물

교사의 보람은 제자를 길러내는 일이다. '청출어람'을 기대하기도 하고, 나는 많이 부족했지만 아이들 가슴마다 좋은 기억으로 오래 남기를 바라기도 한다. 아이들과의 일 년,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다. 어떤 아이들을 만나느냐에 따라 교사의 일 년은 달라지게 된다.


풀칠하는 법, 가위로 종이 오리는 법,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법, 손 씻는 법, 받아쓰기 기초 셈 하는 법 등 가르쳐야 할 것은 많고도 많다. 어떤 해는 아이들과의 연이 정말 좋아서 아이들 자라는 게 신기하고 대견하여 하루하루가 즐거운 해가 있는가 하면 어떤 해는 어서 올 해가 지나갔으면 하고 바랄만큼 하루를 보내기가 힘들 때도 있었다

 

25년의 초등교사를 거쳐 나는 학교의 중간관리자가 되었다. 단 한 번의 휴직도 없이, 단 한 번의 교과전담제 교사도 하지 않고 25년을 내리 학급 안에서 아이들의 담임교사로만 살았다. 어쩌면 그것이 큰 복일 수도 있는 일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교과전담교사도 한 번 쯤 해 볼걸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많은 아이들과의 만남이 있었다. 대부분의 교직생활을 고향에서 했기에 때로는 친구의 아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때로는 은사님과 한 학교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어느 해는 운영위원장이 동네 오빠이기도 했고, 학부모회장이 여고선배이기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길에서 만나도 이름이 가물거리는 제자도 많고, 오래 전이지만 그 아이의 행동이나 표정이 어제 일인 듯 선명하게 기억나는 제자도 있다. 간혹은 중학교를 거치면서 학업을 제대로 마치지 못해 아픈 손가락으로 기억되는 제자도 있다.

 

오늘은 몇 년 전의 제자인 재영이가 그의 엄마와 함께 나를 찾아왔다. 아이들과의 하루하루가 너무나 즐거워서 학년이 바뀌고도 못내 헤어짐이 아쉽기만 하던 아이였다. 재영이는 어느새 5학년이 되었다고 했다. 내가 2학년 때 담임을 했으니 만 2년이 더 지난 것이다. 그 아이들을 맡았던 해 나는 5명을 가르치던 벽지 학교에서 29명을 가르치는 다인수 학교로 발령을 받았었다.


공부하는 데도 일 등, 노는 데도 일 등인 반이었다. 똑소리나게 발표 잘하고 토론도 잘하는 이 아이들과 공개수업도 여러 번 했다. 내가 써 준 원고로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연습시켜 나간 교내 웅변대회에서는 웅변학원 다니는 쟁쟁한 고학년을 제치고 2학년인데도 대상을 받기도 했다. 11악기 하모니카연주회에서는 담임인 나보다 개똥벌레를 더 잘하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아침자습 시간을 이용하여 하루에 세 글자씩 가르치던 한자는 11월에 열리는 한자검정대회에서 고학년도 어렵다는 5급을 학급의 반 이상이 획득하여 나를 놀라게 했다.


여름이면 커다란 비닐봉지의 세 귀퉁이를 잘라 비옷을 만들어 입고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편을 나눠 물총싸움을 했다. 눈 내린 겨울 아침에는 1교시 수업을 땡땡이 치고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즐겼다. 어느 볕 좋은 토요일은 아이들과 도서관에서 만나 책을 읽고 서점나들이를 했다. 또 어느 날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본 후 함께 돈가스를 먹었다. 아이들의 엄마들까지 함께 한 자리여서 더 좋았다. 내가 요리하고 만드는 방향에 따라 때론 네모가 되기도 하고, 때론 동그라미가 되기도 하던 아이들을 보는 성장의 기쁨이 그 어느 해보다 큰 해였다.

 

오늘 그 학교 개교기념일을 맞아 재영이가 우리 학교를 방문한 것이었다. 그냥 와도 더없이 반가울 일인데 한 보따리의 선물까지 가지고 왔다. 선생님들 나눠드시라고 떡 한 보따리, 아이의 엄마 친정에서 직접 만든 곶감 한 상자, 탐스러운 장미 꽃다발까지. 깜짝 이벤트는 바로 이런 거였다.

긴 초등학교 생활을 마치는 6학년 제자도 아니고, 세월이 지나면 잊혀지고 말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을 기억하고 내가 근무하는 보성까지 찾아온 성의가 반갑고 고맙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나도 세 아이의 학부모였는데 나는 이런 성의를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재영엄마의 마음 씀씀이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

 

우리는 종종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불행을 견디라고 말한다. 입시지옥을 견뎌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고, 좋은 대학을 나와야 좋은 직장을 얻을 수 있고, 좋은 직장의 인간관계를 가져야 좋은 조건의 배우자를 만날 확률이 높다고 말한다. 행복은 우리 곁에 머물기보다 늘 한 발자국씩 우리 앞에 높여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그것을 잡으려고 종종걸음 치다가 언제쯤 우리는 행복해지는 걸까. 정말 중요한 건 바로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일텐데 말이다.

묵은 옷을 정리하다가 호주머니에서 발견한 만 원짜리 한 장, 비오는 날 코끝을 스치는 금목서 향기, 즐겨듣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당첨된 커피 쿠폰처럼 사소하고 소소한 일상에서 발견한 뜻밖의 경험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하는 건 아닐까. 바로 지금 행복해야 그것이 쌓이고 쌓여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리라.

특별한 선물을 받은 오늘, 행복이 몽글몽글 피어난다.(201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