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군에게
차가운 바람이 목덜미와 겨드랑이로 파고드는군. 서른이 될 때까지 자네의 나날은 계속 겨울일 걸세. 봄의 꽃 내음도 여름 바다도 가을 단풍도 자네의 몫은 아니지. 하루하루가 자네에겐 불안의 연속일 것이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와 이미 가버린 시행착오에 대한 자책의 밤이 찾아들 걸세. 누가 내게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순간을 꼽으라면 20대 후반 몇 년이라고 말하겠네.
영민한 자네이니 벌써 느끼고 있겠지? 축복은 짧고 현실은 냉엄하다네. 이제 자네를 지킬 사람은 자네뿐일세. 밤새 술잔을 기울이던 벗들의 웃음도, 진리를 가르치던 스승의 넉넉한 품도, 하루 종일 누워서 빈둥거려도 누구 하나 참견 않던 문과대 앞 벤치도, 이제 더 이상 자네 것이 아니라네. 자넨 처녀항해를 떠나는 초보 중의 초보 선원일뿐이야. 현실은 자네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지. 밤을 새워 일하더라도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이 자네의 허리를 짓누를 걸세.
K군.
숨고 싶고 달아나고 싶겠지. 그러나 자네의 지친 몸을 뉠 곳은 없다네. 자넨 그 불합리하고 벅찬 일들과 맞서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하네. 자네만의 자리를 만들어야 하네. 무릎이 꺾이고 허리가 휘더라도, 냉정한 말이네만, 당분간은 문과대학으로 찾아오지 말게. 생각도 말게. 누가 자네의 울음을 들어주겠는가. 어리광을 부릴 나이도 엄살을 부릴 나이도 훌쩍 지나가 버린 거라네.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이 악 물고 탄광에서 혼자 석탄을 캐는 광부처럼, 홀로 싸우게. 그 싸움을 치르고 살아남을 때까지, 우린 만날 이유도 없고, 만나서 할 말도 없을 게야.
누군들 그렇게 살지 않으리. 조금씩 빛깔은 다르지만 삶의 고행은 마찬가지일세. 20대 후반을 훌륭하게 넘겨 그 고행을 따뜻하게 감쌀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하네. 달마다 나오는 월급봉투에 낙담하지도 말고 기뻐하지도 말게. 돈 몇 푼 많고 적음보다 자네가 쉰 살이 되었을 때 무엇을 하고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게. 이십 여 년 후 자네의 모습을 위해 지금부터 착실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게지. 당장은 이득이 없더라도 먼 훗날을 보며 오늘의 가난과 고통을 이기게. 누구누구를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자네만의 삶을 이제부터 사는 게야.
감히 한 가지만 더 권하자면,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자네의 고민을 글로 써보라는 걸세. 시도 좋고 수필도 좋고 하다못해 메모라도 괜찮으이. 지금 자네의 모습을 한 문장 한 문장 적어 내려가다 보면, 자네의 꿈과 희망, 절망과 한숨을 되새길 수 있을 거야. 술 몇 잔으로 풀거나 잊어버리지 말고, 그 정신적 방황을 모두 자네 가슴에 쌓아두게나. 나중엔 그 글이 자넬 변화시킬 게야.
‘슬픔만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고 노래한 시인이 있지. 정말 그렇다네. 20대 후반의 슬픔과 고통은 자네 인생에 두고두고 거름이 될 걸세. 그 거름을 받아서 자넨 자네만의 거대한 나무를 키워내야 하네. 싹이 나고 나무가 첫 열매를 맺을 즈음, 나를 초대해주면 참으로 고맙겠네. 그땐 또 내가 키워낸 나무도 함께 보여줌세. 졸업과 함께 우리는 사제지간이면서 또한 삶의 도반이 되는 거라네.
K군.
자네의 짧은 삶에서 오랫동안 아름다운 꽃 틔우고 탐스러운 열매 맺기를 하나님께 기원하겠네. 피곤하고 힘겹지만 좌절하지 않고 운명과 맞서 싸우는 사람이 되리라 믿네. 건투하기를!
2003년 늦가을
김탁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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