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근무하던 작은 학교 외서에서는
농산어촌실무실습이라 하여 광주교대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실습의 기회를 제공한 적이 있었습니다.
순천에서도 50분, 광주에서도 50분이 걸리는
전교생 20여명의 그 작은 학교에
누가 과연 오기나 할까?
걱정하면서도 우리가 하고 있는 지금 이 교육이
전남 농촌의 살아있는 현장이겠거니 생각해서
교사로서는 부담이 컸지만
연 3년동안 요청하여 추진하였지요.
부가점이라고는 병아리 눈물만큼밖에 되지 않아
승진하는 데 딱히 도움이 되지도 않고,
학생들 맞아들이랴, 프로그램 짜랴, 뒷처리로 보고공문 만들랴
일은 엄청나게 많았지요.
첫 해에는 10명의 학생들이 왔었지요.
학원도 다니지 않고, 일단 학교 오면 학교공부와 방과후학교 참여로
오후 5시가 되어야 집에 돌아가는 외서아이들.
그 단조로운 일상에서 도시에 사는 삐가번쩍하게 보이는
교생선생님이 10명이나 오시면
아이들의 눈빛이 먼저 달라집니다.
선생님이라기보다는 형과 누나에 더 가까운 이쁜 선생님과
함께 수업하고, 축구하고, 체험학습 가고,
책 읽어주고 그러다보면 짧은 1~2주일이지만 정이 담뿍 들기 마련입니다.
사람을 그리워하고,
한 사람의 손님만 와도 반기는 우리 아이들의 눈빛을 못잊어
내년에는 이렇게 힘든 일 신청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던 걸 잊어버리고 또 신청하곤 했었지요.
그때 본 대학생들의 모습은 우리가 학교 다니던 시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우리가 학교다니던 시절의 교대는 납부금이 정말 쌌습니다.
그뿐입니까?
학기에 한번씩, 학비보조금이라고 하여 납부금의 1/3가량이 나왔지요.
교과서도 사고, 아껴쓰면 한 두 달 생활비는 될 수 있을 정도의 자금이었지요.
그래선지 전남의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은
학교 다닐 때 반장 한 두번 안해 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지방출신이지만 나름 자부심도 강했었지요.
또 대도시 출신보다는 지방 출신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요.
요새 교대생들,
최고의 공부잘하는 사람들이 모인 것은 물론이고요.
면면을 살펴보면, 사교육 없이는 대학 들어올 수 없는 구조적인 현실탓인지
입고 다니는 거며, 돈 쓰는 거며
우리가 학교다니던 시절과는 많이 다릅니다.
새로 발령받은 신규선생님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때는 왜 그리 가난한 학생들이 많았을까요?
저 역시 프롤레타리아 무산계급 출신인지라
낯선 광주에서의 생활이 녹록치는 않았습니다.
우리 집에서야 부모님 사랑받으며 큰 소리 치며 살던 큰딸이었으나,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사는 생활은
당당함도 자신감도 잃어버리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돌아보면 인생의 가장 어려웠던 그 순간에 나에게 손내밀어준
고마운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 한 명이 그리운 이름이라서 어떻게 소개를 해야할까 궁리하다가
만난 지 일주일이나 지나버린 내 친구 지숙이입니다.
내 친구 지숙이는 목사님이 되었습니다.
동명동 농장다리 밑 자취방에 살던 대학 2학년시절,
지숙이는 교회조차 다니지 않는 평범한 아이였습니다.
결혼 후 신학대학을 다니고, 가정과 배움을 병행해나가는 이중생활 끝에
큰 교회의 부목사를 거쳐 개척교회의 목사님이 된 것이 십년 전입니다.
자발적인 가난을 실천하고,
낮은 곳으로 임하는 신도들을 위로하고 보살피며
목회자를 가르치는 목사님이 되어
우리앞에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전주여행 뒤
이른 아침을 먹고 내친김에 공주까지 달려갔습니다.
신도가 달랑 한 명 뿐인
내 친구 목사님이 운영하는 <공주 노동리 새은혜교회>의 일요예배에 참석하기 위해서였죠.
길이 있을까?
내비게이션에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구불구불한 길을 거쳐
교회에 이르렀을 때, 십자가 하나 없이,
화려한 교회 현판 하나 없이
달랑 한 명 뿐인 신도만이 우리를 반기는 그 초라한(?) 교회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정확히 십년 만에 다시 보는 내 친구 지숙이는
내가 그러하듯이 머리는 흰머리칼이 많아졌고,
눈가에도 주름이 있는 중년의 아줌마가 되어있었습니다.
나는 늙어도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은 그대로이길 바라듯
내 친구의 나이든 모습은 울컥 나를 슬프게 하였지요.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바로 예배에 들어갔습니다.
돌아보니 자발적으로 교회예배에 참석한 건 처음이었습니다.
공주 간 다섯의 친구 중 교회를 다니는 친구는 둘,
나머지 둘은 절을 다니고,
저만 이도 저도 아니었습니다.
예배는 첫번째 신도 최남수 할머니,
부천개척교회 신도 한 명,
그리고 목사님의 남편 한 명, 우리....이렇게 8명을 앞에 두고 진행되었습니다.
일체의 신단 꾸미는 걸 배제하였기에 실내에도 화분 하나,
예수님 걸린 십자가, 꽃 한송이 하나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비신자가 많았기에 설명을 해 가면서 하는 그녀의 설교는 힘이 있었습니다.
목회자를 가르치는 목사님이 왜 되었는지 이해가 되면서
섣부른 첫인상으로 초라함을 논하였던 내 마음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녀는 신도가 달랑 한 명뿐인 초라한 개척교회의 목사님이 아니라
자발적인 가난을 실천하는 참목회자의 모습으로 거대한 산이 되어 있었습니다.
내 친구 지숙이는, 예나 지금이나 나보다 남을 더 배려하고 이해하는
참인간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말해주었던 성경의 많은 구절을 인용할 수 있는 능력이 제겐 없습니다.
성경의 어느 한 부분을 말하여도 찾지도 못하는 청맹과니이기 때문이지요.
개척교회의 어려움을 알기에 2층의 사무실과 숙소는
가난한 교회의 수련회 등으로 무상대여해 준다는군요.
작은 교회입니다.
좁은 길을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신앙의 순수성과 단순성을 귀하게 여기는 교회입니다.
울림이 있는 내친구 목사님의 삶을 축원합니다.
어디서든 그녀가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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