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만 않으면 된다.
한지혜/소설가
누구에게나 바닥은 있다. 곤두박질칠 대로 곤두박질쳐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시간이 있다. 어떻게 그곳을 빠져나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시간이 있다. 스물아홉, 그때 나는 그런 바닥을 지나고 있었다.
조짐은 직장에서 먼저 왔다. 유망한 벤처기업이라기에, 높은 급여를 보장한다기에 과감히 이직했는데 한 달 두 달 월급이 연체되더니 급기야 여섯 달 월급이 나오지 않았다. 통장 잔고가 바닥날 무렵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뇌출혈이었다. 열 시간이 넘는 대수술을 받았지만 식물인간이 되셨다. 보험 같은 건 없었다. 몇 몇 백만 원씩 청구되는 병원비는 형제들이 각출해야 했다. 나는 살던 방의 보증금을 뺐다. 그동안 모은 돈으로 독립적인 인생을 살겠다며 보란 듯이 마련한 공간이었다. 열 평 남짓한 임대 아파트로 두 손 들고 들어왔다. 실연도 겪었다. 월급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사람도 돈도 없는 막막한 시간이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내 앞에 섰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가 왔다. 글 쓰고 사진 찍는 이지누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내 사정은 모르고 오랜만에 밥이나 먹자고 하셨다. 안부를 묻기에 저간의 사정을 읊었다. 다른 사람들은 사연을 반도 듣기 전에 푹푹 한숨만 쉬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별다른 내색이 없었다. 이 집 음식이 어떻고, 차 맛은 어떻고 그런 이야기만 하셨다. 그러다가 식사가 끝날 무렵 불쑥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셨다. 식물인간으로 살다 간 동생이야기, 그때의 시간들. 뒤통수 치고 돌아선 첫사랑 이야기도 하셨다. 평소 사적인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던 분이셨다. 나는 묵묵히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나오는 길. 나는 이리로 가야 하고, 너는 저리로 가면 된다고 방향을 일러주면서 선생님이 내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으셨다. 그러고는 말씀하셨다. “네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그 말이 ‘쿵’ 심장을 쳤다. 병원비를 위해, 먹고 살기 위해 일자리부터 찾아야 했다. 문학은, 미래는, 내게 가장 사치스러운 단어였다. 꿈도 꾸지 못하고 살아갈 청춘 때문에 가슴이 먹먹했다. 그래도 잊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다. 환한 봄날 사람 많은 거리에서 눈물이 터졌다. 나는 펑펑 울며 저리로 가면 된다고 가리켜 준 길의 끝을 노려보고 또 노려보았다. 그리고 걷기 시작했다. 아득아득 걷고 또 걷다 보니 그 시간이 지났다. 늪처럼 깊던 바닥도 벗어났다. 생각해보니 아주 깊은 바닥도 아니었다.
2008년 11월 19일(수) 좋은생각 12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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