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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삶과 문학

이십 년

 

 

이십 년

 

 

20081021()의 일기

제목: 내 남자 친구를 소개해요!

내 남자친구는 박철이(가명). 취미는 자동차 그리기다. 다 그린 건 나에게 보여주고 마음에 든 것을 고르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귀여운 것을 고른다. 언제는 내가 커플링을 하자고 해서 지금 하고 있다. 지금 이틀째이다. 난 지금의 커플링이 좋다. 난 남자 애들한테 별로 인기가 없고 여자 애들한테는 인기가 많다. 난 내 남자친구가 아직까지는 좋다. 철이야, 사랑해!!

 

 

 

 

위 내용은 우리 반 지숙이(가명)가 쓴 일기의 전문이다. 또래의 아이들에 비해 올망졸망 작은 아이들이 많은 우리 반에서도 철이는 가장 작은 키를 가진 아이이다. 2Kg이 안되는 미숙아로 태어나서 인큐베이터에서 세상을 먼저 대했다는 아이다. 3학년이지만 유치원생 정도의 키를 가지고 있어 반 친구들이 돌아가며 업어주는 걸로 놀이의 대상이 되는 아이이기도 하다. 그런 철이보다 목 하나쯤 더 있는 키를 가진 지숙이가 사랑한다는 거다.

 

 

글쓰기의 기본이 일기지도에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교사가 된 이후로 일기검사를 소홀히 한 적이 한 해도 없다. 내 제자들은 일년이 지나면 잘 썼든 못 썼든 몇 권의 일기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의 사생활 침해니 등의 논란이 일기도 하지만 나는 내 소신대로 첫 발령을 받은 20년 전부터 일기쓰기에 공을 들이고 있다.

 

 

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의 축소판이라는 걸 나는 자주 실감하곤 한다. 힘 센 아이가 힘이 약한 아이를 누르기도 하고, 몰래 괴롭히기도 한다. 그 방법이 어른 뺨치게 교활한 면이 있어서 때론 놀라기도 한다. 담임 교사의 앞에서와 친구들 앞에서의 행동이 너무 달라 뒤늦게 놀라움을 주는 아이도 있다. 말없이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하는 아이가 있고, 수줍어 내 손을 잡지도 못하면서도 늦게 밥을 먹고 급식실을 나서는 나를 기다려주는 아이도 있다. 또 어떤 아이는 밥 먹는 내 목을 끌어안고 식사를 빨리 하라고 재촉하는, 사랑을 과하게 표현하는 아이도 있다.

 

 

갖가지 예측할 수 없는 이런저런 상황에서 학교라는 울타리에만 들어서면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를 정도로 후딱 가는 날들이다. 건강과 끝없는 인내력이 요구되는 직업, 초등학교 교사. 교직에 뛰어든 지 올해로 만 20년이 된다. 열정은 있으되, 경험이 부족해서 좌충우돌하던 신참 시절도 있었다. 경험은 풍부하나 열정이 부족하고 자칫 타성이라는 유혹이 끼어들기 쉬운 중견교사가 지금의 내 모습이겠지. 이십년. 짧지 않은 시간이다. 요즘처럼 정년이 단축되고 서른이 넘는 고학력 실업자가 넘쳐나는 시절에는 더더욱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이다.

 

 

소리를 이십년 간 했더라면 나름대로 득음의 기회를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기술자 이십년이면 장인 옆에라도 갔을 터인데 교사 이십년에 남은 것이라고는 남자처럼 걸걸해진 목소리에, 서서 일하는 직업병의 하나인 하지 정맥류 약간. 정들어서 지지고 볶다가 이제 좀 익숙해 질만 하면 훌쩍 떠나버리는 아이들. 새로운 아이들과 또 정을 들여 일 년을 살아내야 한다. 손에 익어 꿰뚫을만하면 바뀌는 교육과정, 학년이 바뀌면 매 시간 새로이 공부하지 않고서는 재미나게 가르칠 수 없는 체계여서 쌓아온 노하우도 별 쓸모가 없게 되어 버리고 만다.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제자를 길러내지 않냐고……. 맞는 말이다. 일년이면 서른 명 가까이. 이십 년 동안 담임을 맞지 않은 적이 한 해도 없었으니 어림잡아도 600여명의 아이들을 가르친 셈이다.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기억 속에 선명한 아이도 있고, 불과 몇 년 전의 제자지만 우리 반이었나, 싶을 정도로 기억이 가물거리는 제자도 있다. 개성과 소질이 각기 다른 아이들은 흡사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탁구공 같다. 우주인과 사람의 반반이라는 천방지축 일학년부터, 덩치나 목소리에서 교사보다 큰 아이들이 많은 육학년이 한 울타리에서 생활하다 보니 그 부딪히는 정도가 어떠할지는 상상이 되지 않을까?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같은 걸 또 물어보고, 또 물어오는 아이들 때문에 하루에도 열 두 번이나 속이 터지지만, 참새처럼 인사하는 귀여운 아이들이 있어 하루의 시작은 날마다 새롭기만 하다. 교사의 손끝에 따라 직육면체가 되기도 하고, 정육면체, 혹은 원이 되기도 하는 아이들의 성장은 그 얼마나 놀라운 현상인가?

 

 

이제 이십년. 앞으로 아이들 앞에 설 수 있는 시간이 얼마만큼 남았는지 가늠할 수는 없다. 그러나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나는 오래도록 이 아이들의 선생님으로 남고 싶다. 세상의 많고 많은 직업 중에서 철이나 지숙이처럼 맑은 영혼을 가진 아이들과 하루를 열어갈 수 있음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20081117()의 일기

제목: 질투심

점심시간에 점심을 먹는데 앞에서 철이랑 민지랑 말하고 있었다. 난 무슨 얘기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질투가 났다. 왜 질투가 났냐면 내 생각에 아직도 철이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난 밥을 먹으면서 철이가 바람을 피나 안피나 감시했다. 언제라도 바람피면 안되기 때문이다. 철이랑 민지 커플은 상상하기도 싫다.

내일부터 철이(남자친구)를 학교 안에서 감시를 해야겠다. 안 그러면 철이가 바람을 필 수 있기 때문이다. 감시를 철저히 해야겠다. 어휴, 얄미운 민지 때문에 너무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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