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크리스마스 선물 / 양선례
긴 장마였다. 무려 50일쯤 이어진 여름 장마. ‘석 달 가뭄에는 살아도 열흘 장마에는 못 산다’는 옛 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세상은 음습했고, 구석진 곳에는 어김없이 곰팡이가 피었다. 90도가 넘는 습도에 사람도 동물도 기진맥진이었다. 그래서일까. 올가을이 유난히 길다. 열흘만 있으면 12월인데 아직도 거리에는 붉은 단풍이 남아 있다. 은행잎 구르는 가로수 길이 환상적이다. 비도 거의 내리지 않았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모처럼 비가 내렸다. 가을 끝자락이어선지 그 비는 어쩐지 을씨년스럽고 쓸쓸하다. 사무실로 들어와서 따끈한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음악을 틀었다. 이런 날에는 누가 뭐래도 조덕배다. 조덕배. 굴곡 많은 그의 인생이 보석 같은 곡을 만들게 했을까. 그가 만들어 스스로 부르는 노래는 한없이 부드럽다. 그냥 평안하게 듣다가도 어느 순간 슬퍼지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가 살아온 시간을 안다면 더더욱 그의 노래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노래가 발표된 지 30년이 훨씬 지났지만 아직도 여러 가수가 그의 곡을 리메이크해 부를 만큼 명곡이 많다. 하지만 아무리 가창력이 좋은 가수가 불러도 그의 독특한 창법과 음색 때문에 원곡의 느낌을 넘어서지 못하다고 느끼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나는 그의 노래와 청춘을 함께했다. 그는 내가 대학교 2학년이던 1985년에 첫 앨범 <나의 옛날 이야기>로 데뷔했다. 중학교 2학년 때 2집 앨범 타이틀곡인 <꿈에>를 만들었다고 하니 감성이 남다른 소년이었을 게다. 89년에 발표한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은 지금 들어도 하나도 촌스럽지 않아 내 노래방 애창곡이기도 하다. 세련된 외모도 아니었고, 장애까지 있었기에 당시에는 가수로 성장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역경을 딛고 오로지 노래 하나로 승부하여 지금도 수많은 마니아층은 확보하고 있는 가수 조덕배. 삶의 고비마다 나는 그의 노래를 많이 듣고 불렀으며 또 위로받았다. 그가 대마초를 피워 구속되거나, 뇌출혈로 쓰러졌다는 기사를 접할 때면 잘 아는 지인이 그런 듯 가슴 아팠다.
그런 그가 데뷔 23년 만에 첫 ‘크리스마스 디너 콘서트’를 한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보았다. 마침 한학교에 근무하던 유치원 선생님도 그의 오랜 팬이었기에 둘이서 계획을 세웠다. 콘서트가 열리는 날은 겨울방학 첫날이자, 크리스마스 날이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달려 콘서트가 열리는 서울 청담동 리베라호텔에 도착했다. 입구에는 얼음으로 조각한 거대한 전시물도 있었다. 커다란 원탁 테이블의 정해진 자리에 앉으니, 저녁으로 스테이크가 나왔다. 호텔식이라 하여 기대했건만 고기는 식었고, 질겼다.
6시 반이 되자, 휠체어를 탄 그가 등장했다. 딸과 부인도 소개하고, 추가열이 ‘손님’으로 나와서 노래 몇 곡을 들려 주었다. 다시 조덕배가 등장하여 내가 좋아하는 <그대 내 맘에 들어오면은>을 불렀다. 박자는 놓치고, 간간이 음정도 불안했다. 호흡은 짧았고, 고음은 올라가지도 않았다. 한 곡을 마치면 안도감에 박수가 저절로 나왔다. 그저 실수하지 않고 무사히 이 콘서트가 끝나기를 간절히 빌었다. 젊은 날의 청아하고 맑은 목소리 대신 쉰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지만 가슴이 벅찼다. 먼 길을 달려 그냥 여기 이 자리에 함께한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이었다.
좋아하는 가수가 나처럼 늙어 가는 걸 보는 건 슬프다. 나는 비록 중력의 원리에 충실하여 모습이 변할지라도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 주기를 바란다.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려고 한 지나친 성형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화려한 조명에 사람들의 관심과 박수를 받는 연예인 생활을 접고 자연인으로 살다가, 나이가 들어 다시 무대에 서면 안쓰러울 때가 있다. 그냥 좀 편안하게 나이 먹으면 안 되나. 늙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듯 보여 안타깝다.
큰딸은 프로 야구 한화이글스 팬이다. 서울로 대학을 가자, 지금까지 응원하던 기아팀 대신 한화에 빠지고 말았다. 걸출한 ‘코리안 몬스터’ 류현진 선수가 있을 때는 물론이고 그가 미국으로 가고 한화가 도맡아서 꼴등을 할 때도 연고지 대전까지 쫓아가는 열성을 보였다. 한화 팬들은 스스로를 ‘보살’이라고 부른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것이 인생이라고는 하지만 거액의 연봉이 오가는 프로의 세계에서 그 내리막이 십 년 이상 되는데도 변치 않는 사랑과 지지를 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조덕배의 첫 콘서트가 열린 지도 어느새 12년이 지났다. 지금까지 그는 7번의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되었다. 많은 연예인들이 한두 번 ‘대마초 가수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조덕배는 그 중에서도 가장 많다. 아마 단독 콘서트를 다시 열기는 힘들 것이다. 2008년 9집 앨범을 끝으로 더 이상의 곡 작업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그의 팬이다.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으며 잘 나갈 때는 세상 사람 누구나가 박수를 보낸다. ‘보살’ 한화 팬처럼 무대 위의 조명이 꺼진 뒤에도 돌아서지 않는 이가 진정한 팬일 것이다.
회갑을 넘긴 그는 지금도 무대에서 노래한다. 휠체어에 앉아서 노래하는 그의 발음은 불안하고, 박자는 간간이 놓치며, 가사가 제대로 전달되려나 보는 사람이 걱정할 만큼 얼굴 근육을 찡그리며 힘들게 노래한다. 젊은 날의 맑고 깨끗해서 좋아했던 그의 목소리 대신 거칠고 탁한 음색이지만 온몸을 다해 노래하는 모습은 울컥하는 감동을 준다. 앞으로도 나는 그의 영원한 팬으로 남을 것이다.
피아노 전주가 흐른다.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청춘의 한 시절로 순간이동하게 만드는 마력을 가진 그의 노래 ‘슬픈 노래는 부르지 않을 거야’를 듣는다. 좋다.
가슴에 몸부림치는 추억도/ 가슴에 몸부림치는 미련도
가슴에 몸부림치는 사랑도/ 너를 위하여 모든 걸 잊어 줄게.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며/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립다 해도
너를 위하여 너 하나만을 위하여/ 슬픈 노래는 부르지 않을 거야.
그러나 그대 때문에 받은 이 고통도/ 이 마음에 잠든 사랑 있어
슬픈 노래는 부르지 않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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