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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창작

화려한 반란

화려한 반란 / 이팝나무

 

 

초임 발령을 다른 친구들보다 일 년 늦은 대신 집 가까운 곳으로 받았다. 중간에 버스를 갈아타야 해서 출퇴근 시간이 한 시간쯤 걸렸으나, 동창들 대다수가 문화생활을 전혀 할 수 없는 도서 지역으로 받은 것에 비하면 엄청난 특혜였다. 면 소재지에 위치한 14학급의 중규모 학교였는데 인근에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있었다. 교사들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이 절반이고 나머지는 인근 지역에서 출퇴근했다. 2년 선배 언니들이 다섯 명이나 있어서 저경력과 고경력 교사가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다.

 

4학년 3반 42명의 담임이 되었다. 동학년 두 분의 선생님은 경력이 이십 년 가까이 되는 중견교사였다. 두 반은 교무실이 있는 본관 동에 있고, 우리 반은 옆에도, 아래층에도 일반 교실이 없는 도서관 2층 별채에 있었다. 이론과는 다른 학교 생활에 모르는 것투성이인데 물어 볼 사람이 없었다. 지금과는 달리 교실에 전화기는 물론 개인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학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통 알지 못했다. 학급 교육 계획은 동학년 부장 선생님이 내라는 것 그대로 제출했고, 교실 뒤 환경판은 다른 학급은 다 채워지도록 빈 채로 있었다. 지도서를 보고 겨우 그날그날 수업은 했지만 옳게 하는지 확신도 없었다. 교무부장 아들이 우리 반이어선지, 더 두고 볼 수 없으리 만치 엉터리여서 그랬는지 두 달쯤이 지나자 또 갑자기 후관 동 2학년 교실 옆으로 이사 가라고 했다.

 

교장 선생님은 원래 전남의 서부에서만 교직생활을 했는데 동부에 위치한 우리 학교에 좌천되어 왔다. 정년을 앞두고 이 년 더 근무할 욕심에 호적을 고친 게 들통났다고 했다. 교감은 공공연하게 교장 흉을 봤다. 교장실과 교무실 사이의 문이 열려 있어서 하는 이야기가 다 들리는 줄 알면서도 거짓말쟁이 말을 누가 믿겠느냐, 교육자가 그래서 어떻게 아이들 앞에 서겠냐고 말했다.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작아졌고, 교장실이나 관사에서 존재감 없이 지내는 날이 많았다. 학교 운영의 대부분이 교감의 머리와 손끝에서 계산되고 움직였다.

 

아이도 교사도 도시락을 싸 오던 시절이었다. 이 년 선배 언니 둘, 열 살쯤 많은 다른 학년 선생님과 보건 선생님과 함께 보건실에서 점심을 먹었다. 주 메뉴는 ‘교감 씹는 일’이었다. 어제는 이랬다더라, 오늘은 이러더라. 들어도 믿고 싶지 않은 상식에 어긋나는 이야기가 날마다 전해졌다. 그 자리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말 한마디 못 하고서는 뒤에서만 분개하기 일쑤였다. 나는 그게 더 이상했다.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 억지소리인데 왜 참고 있지. 개선하려면 말해야 할 것 아닌가. 군부 독재정권 시대에 대학을 다닌 나에게 학보사 선배들은 늘 그랬다. 꺾일지언정 휘지는 말라고.

 

당시 지역에는 ‘백운기 초·중·고 축구대회’가 있었다. 학교마다 출전했고, 우승에 사활을 걸 만큼 경쟁이 치열했다. 축구 지도를 잘하는 선생님은 어느 학교로 가나 우대받았다. 교사가 공부 잘 가르치고, 생활 지도 잘하면 되지 않나.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개인의 취미와 특기에 상관없이 젊은 남교사들은 운 나쁘면 축구부를 지도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출근해서 일 교시 수업이 시작되기 전까지, 그리고 방과 후 연습은 필수였다.

 

고 선생님은 나와 입교 동기다. 제주도에 뿌리를 둔 ‘고부량(고씨, 부씨, 양씨)’ 이라며 서로 반갑게 인사했다. 서른 후반인데 아내와 아이 둘, 어머니까지 대식구가 비좁은 학교 관사에서 살았다. 체구도 작아서 도통 운동에는 특기가 없어 보였는데 전년도에 축구 감독했던 선생님이 고사하는 바람에 학교에 부임하자마자 축구부를 맡게 되었다. 아침 운동을 마치고 땀범벅이 되어 교무실에 들어오는 선생님을 볼 때면 짠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교감 선생님은 그 반의 남은 아이들이 아침 자습은 안 하고 떠드는 소리가 교무실까지 들린다고 자주 흉을 봤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아는데 저러는 걸 보면 선생님의 지도력이 어떤지 알 만하다고 했다.

 

한번은 전 교원이 모인 자리에서 고 선생님을 질책했다. 이미 한 번쯤은 들어 봤을 말을 직접적으로 하면서 망신을 줬다. 묵묵부답으로 교감 책상 앞에 서 있는 고 선생님이 측은하기 짝이 없었다. 아직은 ‘교사’라는 직업인이기보다는 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학생’의 시각으로 바라봤기에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교감 선생님! 고 선생님이 몸이 두 개가 아니라서 운동장에서 축구, 교실에서 아침 자습 지도를 동시에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럴 거면 교감 선생님이 6학년 교실에 가셔서 아침 자습을 지도하면 좋지 않을까요?” 하고 따졌다. “오, 이팝나무는 고○○의 대변인, 고○○은 이팝나무의 대변인이구먼. 둘이 무슨 사이여?” 이 유치함이라니. 글을 쓰는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점심을 같이 먹는 선배 교사들은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느냐, 이팝나무 멋지다고 한마디씩 했다.

 

교감이 즐겨 쓰는 말 중에 저학년은 교사와 아이의 활동 비중이 6대 4, 중학년은 5대 5, 고학년은 4대 6이 있다. 즉 저학년은 교사가 주도적으로 수업을 이끌고, 고학년으로 갈수록 교사의 말은 줄이고 학생의 활동이 주가 되는 수업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한 번은 4시에 시작한 직원회의가 4시 50분이 되도록 끝나지 않았다. 4시 55분 버스를 타지 않으면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걸 번연히 알면서도 시간을 끌었다. ‘니네들 골탕 한 번 먹어 봐라’는 교감의 패가 그대로 보였다.

 

교직원 대다수가 시계를 자꾸 보면서도 거의 한 시간 가까이 교감 선생님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4시 55분이 되자 그제서야 혹시 다른 의견 있느냐고 물었다. 한 말 또 하고 또 하는 것에 넌더리가 나던 참이었다. “교감 선생님은 평소에 우리들에게 그렇게 가르치면서 왜 실천은 하지 않으십니까. 고학년들도 4대 6으로 수업하라고 그렇게 강조하면서 하물며 성인들에게 55분 말씀하시고 기껏 5분 남겨놓고 말하라는 게 말이나 됩니까?”라고 따졌다. 내가 한 말은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나는데 그 뒷일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기억에 없다. 고개 숙이고 마지못해 듣고 있던 대다수의 선생님들이 시원하다고 생각했을까. 아님 신규 교사 버릇없다고 여겼을까. 그래, 너 잘났다고 웃어 넘겼을까.

 

모난 돌이 정 맞는다. 그해에 나는 전 교직원이 있는 자리에서 세 번이나 교감과 맞섰다. 말이 안 되는 상황에서 한 마디 말도 못하는 다른 선생님들보다 조금 더 정의롭고 용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안 돼서 당시의 내 행동이 단순히 젊은이의 치기에 불과했으며 몹시 부끄러운 행동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아무리 내가 옳았더라도 그래서는 안 되었다. 학년이나 교실 배정, 신규 교사를 성장시키는 방법 등에서 너무나 부족한 분이셨지만 내게는 상급자셨다. 그처럼 버릇없이 공개적으로 면박 줄 일은 아니었다. 몇 년 후 그분이 교장으로 계시는 학교에 갈 일이 있었다. 지혜롭지 못했던 그때의 행동을 정중하게 사과했다. 별 말씀 없이 고개만 끄덕였지만 주름살은 늘었고 건강조차 좋아 보이지 않아 가슴이 아팠다.

 

나는 일 년 만에 학교를 옮겨 버렸다. 학교의 매력은 그것이 아니던가. 절이 싫으면 언제라도 중이 떠날 수 있는 것. 초임의 ‘화려한 반란’은 그 해 딱 일 년으로 그치고 말았다. 새 학교에서는 임신하고 아이 낳아 기르느라 윗분들께 아쉬운 소리 하고 부탁해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조금씩 작아졌고, 부당한 일에도 웬만하면 눈 감으며,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순응하는 착실한 직업인이 되었다. 절대로 용납 못 했던 일이 ‘그럴 수도 있지 뭐’로 바뀌었다. 누구나 그 사람이 되어 보기 전에는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나와 조금 다를 뿐이지 틀린 게 아니라는 걸 인정하고 사는 세상은 이전보다 훨씬 여유 있고 재밌다. 교직 경력 33년 동안 조금씩 무디고 성글어졌다. 상류의 돌이 계곡을 따라 흐르고 구르면서 하류에서 둥글어지는 건 순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