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손가락
점심을 부리나케 먹고는 oo공원으로 향한다. 이번 겨울에야 학교 가까운 곳에 공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 맞는 직원과 삼십여 분의 짧은 걷기를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어 간다. 학교를 나와 오일장을 지나 나지막한 언덕을 감아 돌면 공원이 보인다. 작은 언덕이지만 계속되는 오르막에 꽤 운동이 된다. 충혼탑이 있는 정상에 서면 남양면 간척지가 시원스레 펼쳐진다. 그리고 그 너머 바다가 보인다. 올망졸망 섬과 섬 사이에 펼쳐진 좁은 바다지만 흰구름이 둥실 떠 있는 맑은 날이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구별이 어려워 운치가 있다.
삼월의 oo공원은 동백이 한창이다. 꽃은 화사하나 떨어지면 추한 느낌을 주는 겹동백이 아니라 꽃송이는 작지만 고아하고 핏빛처럼 붉은 재래동백이 주를 이룬다. 물 오른 두꺼운 초록잎이 햇살에 반짝인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이형기/ 낙화)를 떠올리게 하는 동백꽃은 땅 위에 내려앉고서도 싱싱하다. 나무 위에서, 땅에 떨어져서, 내 마음속에서 세 번이나 핀다는 동백꽃. 드문드문 초록의 잎 사이에 피어난 꽃보다 통째로 툭 떨어진 땅 위의 꽃이 더 붉은 듯하다.
가뿐 숨을 내쉬며 언덕길을 오르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익숙한 이름이 화면에 뜬다. “선생님, 저 지금 녹동에서 oo으로 나가는 길인데 학교에 계실까요? 잠시 들를게요.” 마음이 급해진다. 드디어 만나게 되나 보다. 몇 년 전부터 간간이 전화하여 안부를 묻던 제자다. 어쩔 때는 광양, 또 어떤 때는 해남이라고 했다. 하는 일도 그때마다 달랐다. 선거가 열리는 해에는 선거캠프 일을 돕는다고 했고, 작년 겨울에는 아는 형님 밑에서 택배 일을 하는데 혹시 절임배추가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말했다. 몇 년 전에는 꽤 오래 전화가 없었는데 그동안에 일본을 다녀왔다고 했다. 홍길동처럼 종횡무진하며 부지런히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한 채 떠돌이로 사는 안타까운 제자이다.
그는 내가 교직 육 년째 되던 해 만난 아이다. 그해 학교를 옮긴 나는 6학년 8반 담임이 되었다. 일곱 개 반은 이층에 있고, 우리 반만 외로운 섬처럼 행정실 옆의 일층 교실이었다. 아직 이 학교에 적응하기도 전인데다 저경력교사여서 동학년 선생님에게서 배울 것도 많은데 그건 고려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처음의 걱정과는 달리 담임 경력 25년을 통틀어 가장 빛나는 아이들을 그해에 만났다. 월말 평가와 학기말 평가가 존재하던 그 때 우리 반은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못하는 게 없었다. 7반 아이들과 합동체육을 일 년 내내 했는데 앞에 나와서 시범을 보이는 것도, 경기가 끝나고 우승 헹가래를 치는 것도 언제나 우리 반이었다.
각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아이들도 많아서 수학이나 영어, 육상경시대회의 대표선수도 우리 반에서 나왔다. 그뿐이랴. 미술이나 글짓기상도 싹쓸이했고, 전교학생회장은 물론이고, 졸업식에서 주는 일등상을 우리 반 두 명 중에서 골라야 하는 행복한 고민도 했다. 담임이 잘 해서라기보다는 살짝만 건드려 주면 저절로 그리 되었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보다 좋은 아이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멍석만 깔아 주고 나무 아래서 기다리지 않아도 홍시가 저절로 입 속에 떨어진 해였다.
이심전심이었으리라. 그해의 아이들은 유난히 나를 따랐다. 지금도 연락하고 종종 만나는 아이들도 있고, 몇 년 전에는 추석 무렵 반창회를 한다고 불러 주어서 이십 대 중반으로 자란 19명의 제자를 한꺼번에 만난 적도 있다. 내 기억과 아이들이 추억하는 내 모습이 너무나 달라서 당황스러웠지만.
준이도 우리 반이었다. 전년도에 아버지의 고향 해남에서 전학 온 준이는 공부보다는 축구하는 걸 훨씬 좋아했다. 또래보다 키도 크고 몸집도 좋아서 운동도 제법 잘 했다. 숙제를 해 오거나 준비물 챙기기, 일기쓰기 등이 전혀 안 되어 하교 후 나머지 공부를 자주 했었다. 엄마도 없이 아버지와 남동생과 살던 아이였다.
준이가 처음으로 연락해 온 건 내가 세 아이 키우느라고 정신이 없던 때였다. 학교로 편지가 한 통 왔는데 발신지가 교도소로 되어 있었다. 축구부를 육성하는 중학교로 진학하여 단체생활을 하던 중 사고를 쳐서 중학교 2학년 때 퇴학당했다는 이야기를 다른 아이들에게서 듣고 있었으나 직접 소식을 전해온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교도소라는 공간이 주는 느낌도 그렇고, 무엇보다 세 아이 키우느라고 잠시의 짬도 낼 수 없었던 시절이라 면회도, 답장도 못한 게 늘 부채처럼 남아 있었다. ‘의지할 곳 없던 그에게 그때 마음 한 자락 내 주었더라면 이후 삶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뒤늦은 후회를 했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이는 종종 소식을 줬다. ‘지금은 어느 학교에 계시냐, 언제 승진하시냐, 언젠가는 꼭 찾아 뵐 거’라며 해마다 스승의 날 무렵이 되면 전화를 걸어왔다.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인지라 제 인생의 ‘유일한 스승’이라는 달콤한 말도 곁들이면서 말이다.
준이가 사무실로 들어선다. 박카스 한 명을 수줍게 내민다. 이십 칠년 만의 만남이다.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으리만치 외모로는 변한 게 거의 없다. 그런데 짧은 스포츠머리에 흰머리가 반이다. 이제 겨우 마흔인데, 아직 장가도 못 갔다는데, 그간의 삶의 이력을 말해 주는 듯하여 가슴 아프다.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도 오래 전에 세상을 떴단다. 그때 선생님이 축구하지 말고 공부하라고 할 때 말 들을 걸 그랬다는 말과 함께 당시 우리 반이던 아이들의 근황을 세세히 알려 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는데도 나는 자꾸만 그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떡 한 접시를 게 눈 감추듯 먹고 일어선다. 정해진 일정으로 직원들이 들락날락하니 마음이 불편했을 게다. 밥이라도 한 그릇 사 줄걸. 또 후회를 한다.
준이는 내게 아픈 손가락이다. 의지할 곳 없는 그 아이가 오죽 외로웠으면 특별히 잘 해 준 것도 없는 오래 전 담임에게 종종 전화를 하겠는가. 교직 초년병일 때는 나는 ‘무조건 아이들 앞에서 모범을 보여야 해, 뭐든지 잘해야 해’라는 병에 걸렸었다. 그러니 아이들이 웃기는 말이나 행동을 해도 소리 내어 웃지 않았다. 만만하게 보이는 게 싫어서 표정을 숨겼다. 어느 순간 그런 마음의 짐을 털어 냈다. 교사와 학생간의 거리를 없애고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일 년이나 되는 긴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잘 살아 내는 방법은 경계를 허물고 한 가족이 되는 거였다. 어린아이일지라도 호감인지, 비호감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예민한 촉수로 알아챘다. 모르는 것에는 솔직히 모른다고 이야기하는 여유가 생겼다. 웃기는 말을 하거나 엉뚱한 행동을 하는 아이를 보면 아이들보다 더 크게 웃었다. 그러면 덩달아 아이들도 따라 했다. 웃음도 전염되었다.
준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다음 번에는 맛난 밥 꼭 살 테니 다시 학교에 들르라고 말했다. 전화 걸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한다. 그러고 보니 전화를 먼저 한 건 처음이다. 아픈 손가락인 줄 알면서도 그동안 통증을 견디고만 있었다. 따뜻한 밥 한 끼가 ' 빨간약'이 되기를 기대하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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