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셋을 키우면서 직장 생활 하느라 나는 허덕이며 종종거리고 다녔다.
아침이면 아이들 셋을 깨워 간단히라도 먹이고 입히고 어린이집으로, 유치원으로 데려다주고
출근을 한 후 4층 교실까지 가는 계단을 오르면 뒷골이 핑 돌면서 현기증이 일곤 했다.
퇴근 이후에도 아침에 데려다 준 역순으로 아이들을 찾아 장을 보고 집에 와서
저녁을 해 먹고 치우고 나면 세탁기의 빨래를 12시에 턴 적이 허다했다.
아이들 책 한 줄 읽어줄 여유가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바쁜 나날이었다.
그럴 때 나보다 띠동갑 쯤 윗길인 동학년 선생님들은 오늘은 누구랑 약속이 있네. 어제는 누구를 만나 뭘 먹었네
이야기를 하곤 했다.
"선생님, 무슨 모임이 그렇게 날마다 있으세요?"
"어이, 자네도 내 나이 되어보소. 저절로 그리 되네."
그 말이 빈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말은 진리였다.
나는 지금 그때의 그 선생님보다 훨씬 나이가 많아졌고, 그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보다
훨씬 많은 모임이 생겨버렸다. ㅎㅎ
오늘은 그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모임이 구례에서 있었다.
90년부터 같은 학교에 4년을 함께 근무했었다.
20대 후반이었고, 교단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은 저경력 교사였고
무엇보다 혈기 왕성하여 관리자의 부당한 말에는 도통 움직일 줄 모르는,
그리하여 관리자의 눈 밖에 난 '외인구단'들이었다.
이제는 사는 곳도, 근무하는 학교도 다 다르고 벌써 한 명은 명예퇴직까지 했지만
정기적으로 만나온 지가 30년 가까이 되었다.
그것도 한 사람이 회장 겸 총무로 장기집권하면서 말이다. ㅎㅎ
당연하게도 남편을 만나 결혼하는 과정,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는 모습도 함께 해 왔기에
세월의 더깨가 쌓인만큼 꽤 끈끈하고 편한 모임으로 이어오고 있다.
오늘은 그 중 한 언니가 사는 구례 산동 집에서 삼겹살 파티로 모임을 대신 했다.
집을 지은 지 10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집은 부지런한 주인장의 손길을 따라 윤기가 좔좔 흘렀다.
명예퇴직한 지 3개월이 되었고, 그 전 1년은 병휴직을 하였기에 본격적으로 살림을 한 지는 1년이 조금 넘었다.
정갈하게 잘 정돈된 곳곳의 풍경이 봄꽃과 어우러져 어찌나 이쁜지 감탄을 하며 집구경을 하였다.
나야 이 집 부부의 중매쟁이(40대에 늦은 결혼을 하였다)였기에 이 집에 여러 번 와 봤으나
오늘은 바람이 시원한탓인지
고개만 들면 보이는 지리산 자락이 좋아선지 유난히 더 좋아보였다
축대 아래 언니가 심어서 가꾼다는 분홍 달맞이꽃이 한창이다.
솜씨 좋은 언니의 남편이 만들었다는 대문 옆에 송엽국이 만발하고,
산 아래 주황 지붕의 언니집 마당엔 잔디가 푸르다.
34년 직장생활한 사람답지 않게 고추장에 된장, 김장김치까지 손수 담근다더니 그사이
장독개수가 많이 늘었다.
나무 데크 한 쪽에는 고사리가 말라가고
퇴근 후 농부로 변신하는 형부의 수고로움으로 마늘 수확도 알차구나.
고개만 들면 지리산 노고단이 한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그러나
그러나 이 집에서 가장 욕심나는 곳은 바로 이곳이다.
사방이 편백으로 둘러쳐진 약 7평 가량의 다락방.
한때는 3면이 다 책으로 둘러싸였는데 퇴직 하면서 다 정리하여 버렸다고 한다.
그리고는 한 면에 창을 내고, 긴 탁자와 형부가 손수 만든 의자 두 개를 놓았더니
아름다운 뷰가 있는 카페가 되었다.
1톤 트럭으로 하나 가득 버렸다고 하는데 그 사이에서 살아남은 책들이 한 면을 채우고 있다.
다락방 창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
누구라도 이 풍경에 반할만 하다.
책 만나러 가는 길.
책 만나고 오는 길.
언니는 책을 좋아했고, 대부분의 책들을 직접 사서 보았다.
그리고는 책을 샀을 때의 감상을 속표지에 기록하는데
이번에 책을 버리면서 그 속표지의 글귀 하나하나가 아깝더란다.
하여 일일이 뜯어내어 만든.
책이 바로 위 책이다.
그렇게 만든 책은 모두 19권.
이조차 시간이 없어서 나중에는 다 뜯지도 못하고 팔려갔다고 하니....아깝다.
새삼 언니의 독서력이 놀랍기만 하다.
정갈한 글씨로 그때그때의 감상을 적어내린 글귀 중 몇 장을 찍어왔다.
주인장 부부의 뒷모습.
삼겹살을 구워 텃밭에서 딴 상추에 직접 담근 명이나물, 두릅, 엄나무 순 장아찌를 올려
잘 먹었다.
부부의 성과상여금을 털어 지었다는 정자에서 마침 불어오는 5월의 바람을 맞으며
먹는 기분이 최고였다.
오래 묵은만큼 공유하는 추억이 많기에 이야기는 끝간 데 없이 이어진다.
토요일 오후, 코로나로 힘든 세상은 저 만치 물러가고 지리산 아래 자락에서 많이 먹고 많이 웃으며
많이 행복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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