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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감동이 있는 글

(수필) 어둠이 짙을수록 더욱 빛나지/김지헌/수필과비평사

56쪽 발자국에서 옮겨 적다.

겨울

12월, 첫눈이 탐스럽게 쏟아진다.

예기치 않은 선물을 받는 느낌이 이럴까. 거실에 앉아 내년에는 풍년이 들겠구나 하고 혼잣말을 한다. 그러면서 피식 웃는다. 옛사랑을 떠올린다면 모를까. 첫눈을 보며 풍년을 읊조리다니. 연륜은 사람을 느슨하고 둔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조금은 따뜻하고 이타적인 면모를 갖게 하기도 한다는 생각에서다. 언제부턴가 가뭄이 들면 싹을 틔우고 제 몸을 키울 생명을 염려하고, 날씨가 더워지면 연료를 연소시키며 오염될 환경을 생각하고, 기온이 내려가면 지하도에서 신문을 덮고 자는 노숙자를 생각하게 된다.


내 자리, 작은 책상이 놓인 거실 한 쪽에 앉아 앞산을 바라본다. 한 지인이 그 산의 능선이 하도 예뻐 이사하게 되었다는 수려한 산이다. 황진이의 눈썹이 저리 고왔을까. 아니 서정주의 '동천'을 품은 산이다. 도로를 사이에 두고 시야에 들어오는 산과 나무가 흰 눈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만든다. 행여 그 사이 눈이 쌓였을라 창밖을 보니 눈은 자취도 없다. 세상의 열기가 모두 흡수해버린 탓이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나비 같은 흰 눈은 땅에 떨어지려는 순간 사르르 녹아 스며든다. 굳이 발자국을 남기려 앙탈부리지도 않는다. 욕심이 없으니 미련도 원망도 없다. 베란다 가까이 서서, 무등산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개울물을 보니 하아, 그 새 많이 불어 있다. 저 순백색의 눈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게다. 자신의 존재가 땅 속으로 스며드는 일은 영원한 소멸이 아니라는 것을. 내일 아침에는 더 많은 왜가리를 볼 수 있겠다는 기대에 나는 덩달아 행복하다.


가을

10월, 소멸하는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산길을 걷고 있는데 미풍에 제 몸을 싣고 날아와 사뿐히 내려앉는 단풍잎이 곱다. 아니 예쁘다. 제 스스로 와야 할 때 오고, 가야 할 때 갈 줄을 알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렇고 자연이 그렇고,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그렇다. 생의 마지막 순간은 사람을 비롯하여 모든 것들에게 존재한다. 소멸의 순간이 있기에 생명체의 아름다움 또한 존재할 것이다. 변화하고 유한한 것, 그래서 욕심껏 자신을 뽐내거나 돋보이려 최선을 다해 살아내지 않던가. 그리고 난 후 스스로의 생을 깔끔하게 미련 없이 놓을 때, 그러한 생을 보낸 자연에게, 사람들에게 우리는 존경의 눈빛을 보낸다.


늦가을, 산장에서부터 규봉암을 휘돌아 장불재를 경유하니 무등산 등허리를 한 바퀴 돌게 되었다. 선홍빛의 단풍과 암갈색의 나무들을 보며 가을의 발자국을 따라가 보았다. 떨어진 나뭇잎 자리에는 새봄에 움틀 생명의 터가 자리 잡고 있으리. 소멸의 순간은 재생의 순간을 위해 존재하나니. 그 깊고 오묘한 한 수레바퀴가 어찌 슬픔이나 기쁨, 아름다움 따위의 빈약한 언어들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인가. 그저 작은 생각 하나를 넌지시 남기려 했을 뿐.


여름

8월, 무성한 것들은 소용돌이를 일으킨다.

그래서 한여름 숲 속에 들어서면 현기증이 인다. 나무들이 혼신을 다해 내뿜는 정열의 에너지가 숨막히게 한다. 그것은 여름 생물들이 주는 메시지를 읽는 자에게만 가능한 숨가쁨이다. 충만함을 온몸으로 받을 줄 아는 자의 특권이다. 날숨과 들숨을 반복하며 폐부 깊은 곳까지 스며든 여름 냄새를 맡는다. 여름 냄새, 그것은 열정이다. 산하 어디를 둘러봐도 짙푸른 성숙함이다. 그 성숙은 완숙의 과정을 거쳐 미래의 소멸 단계와 연결된다.


'가을'에서 소멸하는 것은 아름답다고 하였다. 그 아름다운 이유 중의 또 한 가지는 여름의 열정에 있다. 살아있는 동안 혼신의 열정을 사르는 시기가 여름이기 때문이다. 대나무가 꽃을 피우고 죽음을 맞이하듯, 사마귀가 혼신을 다한 교미 끝에 자신의 존재를 암컷에게 전이시키고 죽음을 맞이하듯, 소멸의 순간 전에는 생의 꼭지점이 존재한다. 사람의 변이 과정은 서서히 진행되어 우리는 가시적으로 느끼지 못하지만 인생도 어느 지점에 절정의 시간들이 존재한다. 이 무성한 시기의 생명은 나이테를 만든다. 생의, 살아있는 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존재에의 흔적을 생성하는 일, 여름의 발자국이다.


5월, 환희의 순간들이다.

생명 가진 만물이 용트림을 시작하고도 두어 달이 지났다. 그 사이 가슴속까지 화안하게 밝혀주던 개나리가 지고, 열정을 수줍게 태우던 진달래도 졌다. 온전한 몸을 지키지 못하고 상처난 몸체를 보이느니 차라리 요절하고 말겠다는 듯, 뚝뚝 꽃잎을 떨어뜨리는 자목련도 미련없이 한 생을 다하였다. 추월산의 산벚꽃은 만월의 호수를 보는 것처럼 혼몽하게 했다. 그 즈음, 늦봄의 햇살까지 가세해 세상은 나른한 마술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아름다움 천지인 세상에서 지상에 발 딛고 서 있느라 나는 필사적이었다. 봄은 그렇게 제 발자취를 빠짐없이 재현했다.


5월의 마지막 수요일이었던가. 전 날 비가 와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말끔하게 제 모습을 정리했다. 학교 뒷산의 소나무들은 한층 더 짙푸르러졌다. 오후까지 수업을 하고 지친 몸으로 터벅터벅 걸어 주차장에 도착했다. 긴긴 봄 해는 서산에 걸려 있었지만 보니 아직 그 기운이 창창해 나는 두 눈을 찡그리며 구석에 두었던 차를 찾아 리모콘을 작동시켰다. 차를 향해 걸으면서 보니 차는 온통 누런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매스컴에서 보던 꽃가루 세례를 야무지게 받았다는 생각으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환희였다. 누가 그렸을까, 저 아름다운 그림을. 어쩌면 그리도 앙증스런 자취를 남겼는지 아하, 하고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누가 그리도 오종종한 발자취를 만들 수 있을까. 하루 종일 노오란 송홧가루를 뒤집어 쓴 차체에 참새 두세 마리가 내려와 잠시 노닐다 간 모습이었다. 노란 물감 위에 찍힌 그 발자국은 사랑하는 이를 앞에 두고 너무 황망하게 종종거린 모습도 아니었고, 너무 점잖아서 앙큼 떠느라 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못난 모습이지도 않았다. 적절히 사랑하고 아쉬움을 남긴 채 날아간 참새의 발자국. 사랑스러운 봄의 발자국이었다. 그야말로 조화를 아는 새들의 조홧속이었다. 노란 송홧가루 위에 새긴 새들의 발자국, 봄의 발자취에 홀려 나는 현기증이 일었다.



어제 모임 자리에서 이 분의 책을 전해받았다. 주차장에서 조심히 가시라는 인사를 나눌 무렵에야 이번에 나온 책이 차 속에 있다며 건네준 책이다. 친필 사인을 못해주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나는 이 분에 대해 잘 모른다. 몇 번의 사적인 만남의 자리가 있었지만 멀리 광주에서 내가 사는 순천까지 한 번의 모임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시는 열정많은 분, 그러고서는 조용히 식사만 하고 가시는 분. 수줍고 소녀같고 조단조단하게 말씀하시는 분.


책은 힘이 세다. 책은 그가 머리로 알고 있는 것, 가슴으로 느끼는 것을 한 번에 알게 해 주는 힘이 있다. 더구나 그 장르가 수필이기에 책을 읽고 나면 그 친숙함은 배가 된다. 생활이 빠진 수필은 공허한 메아리같기에 수필가는 자신의 생활을 빼고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김지헌, 이 분은 수필가이자 소설가, 그리고 평론가가 활동하고 있다. 몇 번의 만남이 있었지만 책을 전해받은건 처음이라서 엊저녁부터 단숨에 읽어버렸다.


 생후 8개월만에 아버지를 잃은 작가가 아버지와 고향을 그리는 마음, 이후 외갓집에서 자라면서 이모나 삼촌이 아무리 잘해줘도 느끼던 외로움. 엄마는 애증의 대상이자, 그리움의 대상. 이 분의 수필집 한 권을 읽고서 나는 그 분이 가진 맑은 영혼의 세상, 성장과정에서의 아픔, 세상을 보는 따뜻한 시선을 느낀다. 오래 관찰하고 사유해야만 쓸 수 있는 이런 글을 쓰는 이 분을 다음 번 만날 때는 존경의 마음으로 인사할 것. 오늘 내가 긴 글을 옮겨 적은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