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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감동이 있는 글

업히고 싶은 밤(정채봉 글)


친척 중에 초상이 나서 때이른 귀성이 되었다. 그러니까 추석 열흘 전이었다. 문상길에 선영에 들러서 벌초도 하고 성묘도 했다. 하얗게 피어 있는 삐비꽃을 보고 어린 시절 봄날에 삐비 뽑아 먹던 추억을 돌아보며 혼자 쓸쓸히 웃음을 날렸다.


친구가 차를 내준다고 하였지만 굳이 거절한 것은 모처럼 시간이 났을 때 광양 장까지 한 번 걸어 보기 위해서였다. 내 고향에서 광양 장까지는 삼십 리(12킬로미터) 길이다. 세 시간 남짓 걸리는 도보 거리인데 어렸을 때 무던히도 장에 가던 할머니를 따라다닌 길이기도 하다.


나는 밀짚모자를 하나 사서 쓰고 지금은 산업도로에 가려서 쑥부쟁이 같은 잡초가 무성한 옛길을 따라 세상 편하게 후적후적 걸었다. 다리가 아프면 포플러 그늘 아래에서 두 다리를 뻗고 쉬면서 매미 소리를 들었고 재 위에 올라서서는 하늘을 우러러 흰구름을 바라보기도 했다.


간혹 지나는 경운기와 소한테 길을 비켜 서면서 고랑물로 세수를 했고, ‘하이 슈퍼라는 간판을 단 점방에 들러서는 멸치에 막걸리를 한 사발 사 마셨으며, 옛 생각이 나서 할머니, 그런데...”어쩌구 저쩌구 혼자말을 할 때도 있었는데 지나던 농부가 실성한 사람이 아닌가 하여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것을 보고는 정말 실성한 것처럼 크게 크으게 웃었다.


소강도가 자주 나타났다고 해서 잔뜩 웅크리고 다녔던 무산쟁이재는 이제 성황당의 돌무더기만 남아 허허롭게 주저앉은 모습이었다.


광양 장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었다. 마침 가던 날이 장날이었으나 파장이었다. 저잣저리에 저녁찬거리 장보러 나온 아낙네들만 기웃거리고 다닐 뿐, 한산한 난전에서 막국수 한 사발로 요기를 했다. 유년 시절 할머니를 따라왔던 땐 재수 좋으면 팥죽, 그렇지 않으면 찬물에 사카린을 풀은 국수를 사먹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국수 파는 노인조차도 지금 같은 세상에 누가 그런 것을 먹는다요?” 하며 고개를 저었다.


잠은 섬진강변에서 자기로 했다. 하룻밤쯤 묵을 집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철저히 혼자이고 싶어서 쌍계사 못 미처 서 있는 한 여관으로 찾아들었다. 주말이 아니어서인지 그날 밤 그 여관의 손님을 오지게도 나 혼자였다.


밤이 깊어 섬진강 속에 내려온 별들을 만나 보았다. 소소히 대밭에 걸리는 바람 소리를 들었고, 뜸북새 우는 소리도 오랜만에 들었다. 그러나 정작 오랜만인 것은 다리가 아파서 아이구, 다리야. 아이구, 다리야하고 앓은 것이었다. 예전 장에 왔다 가는 길에서는 할머니가 업어 준 밤이었는데.


(2009년 출간, <눈을 감고 보는 길>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