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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읽은 책/감동이 있는 글

정채봉 성장동화 <초승달과 밤배> 서문(옮겨적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

                   -할머니께 이 책을 바치며


비 온 뒤에 한 켜 더 재여진 방죽의 풀빛을 사랑합니다. 토란 속잎 안으로 숨는 이슬방울을 사랑합니다. 외딴 두메 옹달샘에 번지는 메아리결을 사랑합니다. 어쩌다 방 윗목에 내려오는 새벽달빛을 사랑합니다. 화초보다는 쏙갓꽃이며, 감꽃이며, 목화꽃이며, 깨꽃을 사랑합니다. 초가지붕 위에 내리는 새하얀 서리를 사랑합니다. 무우구덩이에서 파낸 무우들의 노오란 순을 사랑합니다.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왔다는 담양의 그 죽순을 사랑합니다.


고향의, 해질 무렵이면 정갱이에 뻘을 묻히고 돌아오던 건강한 수부들을 사랑합니다. 지나가는 걸인을 불러들여 먹던 밥숟가락을 씻어서 건네주던 우리 할머니를 사랑합니다. 상여 뒤를 따라다니며 우느라고 눈가가 늘 짓물러 있던 바우네 할머니를 사랑합니다. 남의 허드렛일을 자기 일처럼 늦게까지 남아 하던 곰보영감님을 사랑합니다. 명절 때면 막걸리 기운에 코끝이 빨개져서 소구 하나만을 들고 농악대 뒤를 따라다니며 덩더쿠덩더쿵 어깨춤이 신나던 복애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동네머슴 제사를 1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한번도 거르지 않고 지내고 있는 문경의 농바윗골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죽으면서 동네 정자 앞에 있는 소나무한테 자기 재산의 절반인 논 15마지기를 상속시킨 예천의 이수목 노인을 사랑합니다. 눈 쌓인 겨울날이면 산진승들이 걱정되어서 산자락에 무우며 고구마를 던져놓은 송광사 스님을 사랑합니다. 고향을 잊고 사는 사람들에게 고향 소리를 들려주고자 여치 1만 마리를 키우고 있는 전주의 서병윤 씨를 사랑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이 모든 것을 버무려서 그 누구도 아닌 한국의 아이로 복제하고 싶은 <난나>입니다. 풀꽃 하나도 아끼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다운 화평의 피를 가진 아이. 이 땅의 난나들이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산천과 융화해서 사는 삶, 양적인 물질의 풍요보다는 생활의 질을 추구하는 삶, 그리고 보다 높은 인간적 사랑으로 분열을 극복하고 하나되어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글을 쓰게 되면서부터 저는 늘 돌아가신 저희 할머니께 한 권의 책을 올렸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한국예술사의 따뜻한 배려로 그 소원을 이루게 되었음을 감사합니다.


정 채 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