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시꽃 당신...
엊그제는 서울에 갔다가 막차를 타고 여수역에 도착하니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여수역에 도착하면 언제나 여수 특유의 갯내음이 납니다. 30년 전, 군복무를 하다가 휴가를 받아 열차를 타고 여수에 도착하면 어김없이 갯내음이 났습니다.
그러면 열차의 차창을 열고 코를 벌름거리면서 한참 동안 그 냄새를 맡았던 기억이 납니다. 엊그제도 사흘 만에 도착한 여수여서 그런지 반가움이 더했습니다. 천천히 열차에서 내려 역 앞에 있는 택시 정류장으로 향했니다.
그곳에 갔더니 자정이 넘은 시간이라 택시를 기다리는 손님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손님들은 많은데 택시는 한 대도 없었습니다. 역 앞에서 기다리던 몇 대의 택시는 먼저 나온 손님들을 태우고 모두 떠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려도 택시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손님들은 어딘가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습니다. 카카오 택시를 부르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늦은 밤, 여수역에 도착한 손님들의 불편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어떻게 되나 보자며 끝까지 기다려보았습니다.
콜을 받은 택시가 하나 둘씩 도착하고 손님들도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저만 혼자 덩그렇게 남았습니다. 중간에 택시가 두 대 오긴 했지만 저의 뒤에 줄을 서있는 사람이 객지에서 오신 것 같아서 양보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이 새벽 1시 10분이었습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어서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카카오 택시 한 대만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저처럼 카카오 택시를 부를 줄 모르는 사람이 저의 처지가 되면 많이 당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시 후에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갑석씨가 갈꺼예요.”
갑석이는 택시운전을 하고 있는 저의 고등학교 친구입니다. 등하교를 함께 했던 단짝 친구였습니다. 아내가 카카오 택시를 불렀는데 우연히 그 친구가 그 콜을 받았나 봅니다. 5분여를 기다리자 친구의 택시가 도착했습니다. 친구는 깜짝 놀랐습니다.
잘 사냐? 잘 산다. 아이들은 잘 크고? 응, 곧 시집간다. 어머님 건강은 좀 어떠시냐? 최근에 건강이 좋지 않아서 요양원에 모셨다. 이렇게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답하면서 저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다가 친구가 갑자기 이렇게 말했습니다.
“엊그제 우연히 서울에서 오신 손님을 태웠는데 그분이 나에게 여수토박이냐고 묻더라. 그래서 그렇다고 했지. 그러자 그분이 박완규 작가를 아냐고 묻더라.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지. 그러자 그분이 박완규 작가의 책을 읽었는데 여수에 오면 그분을 꼭 만나고 싶다고 하더라.”
"남자디 여자디?"
"여자"
“그래서 뭐라고 했냐?‘
“뭐라고 하긴, ‘ 놈이 내 친구요.’ 했지.”
“ㅋㅋ. 잘했다.”
친구는 자신의 택시에 탄 승객이 가끔 문학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저의 얘기를 하면 ‘내 친구가 이렇게 유명인사가 되었나’ 싶어서 기분이 무척 좋다고 했습니다. 대리 만족도 되고 가끔은 자신이 친구라고 말하기도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러지 말라고 했습니다. 힘든 시절에 함께 만났는데 친구만큼 소중한 존재가 어디 있냐고 했습니다. 다음에 그런 손님을 만나면 "그놈이 내 친구요."하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사실 그 친구로부터 개비(까찌) 담배를 배웠습니다.
야간 고등학교의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몰래 개비(까찌) 담배를 파는 곳이 있었는데 그 친구는 늘 그곳에서 두 개비의 담배를 사서 하나는 자신이 피고 하나는 꼭 저에게 주었습니다. 이것도 음식인데 혼자 먹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친구는 그것을 의리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그동안 참 열심히 세상을 살았는데 하던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 지금은 택시 운전을 하고 있습니다. 친구가 택시 운전을 해도 저에게는 변함없이 소중한 사람입니다. 심성이 착한 친구이니 곧 좋은 날이 올 것입니다.
이렇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저는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는 글쟁이가 되어갑니다. 지금에야 고백하지만 저는 사실 전문적인 글쟁이가 아닙니다. 제가 ‘글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도종환 시인님의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를 읽었을 때로 기억합니다. 결혼 2년 만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하며 쓴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옥수수 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그때는 한참 감수성이 예민할 때욨습니다. 그때 이 시를 읽으며 저는 글에서 향기가 난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제 안에 숨겨져 있던 글에 대한 감각을 조금씩 찾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습작처럼 지금까지 써놓은 시가 200여 편은 넘을 것입니다. 아직 세상에 내놓지는 않았지만 언젠가는 한 권의 시집으로 세상에 내놓을 것입니다. 도종환 시인의 시에서 향기가 났던 시기는 아내와의 사별하고, 전교조 활동을 하고, 좌천이 되고, 해직이 되고, 투옥이 되고, 급기야 긴 투병생활까지 하던 시절로 기억합니다. 그 아픔과 쓸쓸함과 고독함 속에서 마음을 울리는 글이 나왔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랬던 그가 국회의원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대한민국의 문화정책을 총괄하는 장관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가 아내를 잃고 해직이 되고 투옥이 되었던 그 절박했던 마음으로 장관직을 수행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대한민국의 문화를 이끌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를 읽는 나라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고, 책을 읽는 나라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고, 도서관이 술집보다 많은 나라를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고, 대한민국이 세계 속의 문화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초석을 다지는 장관으로 우리에게 기억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프랑스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자국의 명시를 100편 이상 외우게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모든 학생의 의무라고 합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국의 시를 100편 이상 암송할 수 있다고 합니다. 영어 단어를 외우는 것도 중요하고 수학공식을 하나라도 더 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한창 예민한 시기에 문학적 감각을 키워 주는 것 또한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도 한 때 많은 젊은이들이 문학소녀와 문학청년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작은 도시의 예술회관 같은 곳에서 ‘시 낭송의 밤’이나 '문학의 밤'과 같은 행사가 숱하게 열렸던 시절이 있었고, 그곳에는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넘쳐났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모습을 좀처럼 찾기 어렵습니다.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했고 아이들이 꾸는 꿈도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연세대 송복 명예교수가 <시와 시학>이란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이렇게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학교에서 시를 (제대로)가르치지 않는 것은 학생을 모두 '재주 부리는 곰새끼'로 만들려 함에서다. 학교에서 시를 낭송하지 않는 것은 학생을 모두 '요령 피우는 뻐꾸기'로 만들려 함에서다." 그러면서 그는 덧붙였습니다. 인구 370만 명의 작은 나라 아일랜드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네 명(예이츠, 버나드 쇼, 세이머스 히니, 사뮈엘 베케트)이나 배출하고 세계적인 IT 강국이 된 것은 모두가 시의 힘이라고. 접시꽃 당신을 읽으며 난생 처음 시에서 향기를 느꼈던 한 청년이 지금은 글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있듯이, 점점 시를 잃어가고 문학을 잃어가는 세상에서 시과 글이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그리고 거리에서도 넘쳐나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이제 세상이 바뀌어 시인이 장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은 이 험악한 세상에서 시를 읽고 책을 읽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길거리 어디를 가나 책을 읽는 사람이 있는 도시는 분명 사람이 살기 좋은 도시이고 누구나 살고 싶은 도시라 할 것입니다. 도종환 장관이 그거 하나만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내일 아침에 KTX 첫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서울 일을 마치고 나면 오후에 바로 여수에 내려와야 합니다. 저녁에 중요한 약속이 잡혀있기 때문입니다. 내일은 서울과 여수를 오고 가는 열차 안에서 시집이나 한 권 읽어야 하겠습니다.
대원(大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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