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공동체 운동에 관심이 많아 방학이면 이런저런 공동체들을 찾아다니곤 했다. 보육원에서의 성장기를 보내서인지 핵가족보다는 집단적인 공동생활에서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는 편이었다. 그래서 각지에서 모여든 낯선 사람들과 함께 땀 흘리고 간소한 식탁에 마주 앉으면 이내 피붙이처럼 친근해졌다. 1980년대라는 역사적 격변기를 통과하면서 느낀 절망감도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갈망을 부추겼을 것이다.
의정부 근교에 있던 풀무원공동체에 간 것은 대학교 2학년 여름이었다. 벌써 25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으니 지금도 그곳에 풀무원 공동체가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요즘에는 '풀무원'이 대기업으로 성장해 유기농 식품의 대명사처럼 되었지만, 그 시절에는 규모도 크지 않았고 공동체적인 분위기가 오롯하게 남아 있었다. 그 공동체에서 원경선 선생님을 만났다. 물론 그분은 수많은 방문객들 중 하나인 나를 기억하지 못하실 것이다. 그러나 거기 머무는 동안 그분으로부터 받은 강렬한 인상과 교훈은 아직도 생생하다. 원경선 선생님을 생각하면 무엇보다도 밭에서 사람들과 더불어 일하며 작업복 차림으로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분은 80세가 훨씬 넘은 연세에도 매일 여덟 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 타고난 농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의 참다운 기쁨을 모르고서야 어떻게 평생을 한결같이 일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새벽 기도회에서 나지막하지만 힘 있게 울리던 그분의 음성이 떠오른다. 자연의 섭리에 바탕을 둔 농부로서 세속적인 욕망을 깨끗하게 비운 야인으로서 우리에게 전해 주던 말씀은 간명하면서도 깊은 깨달음을 담고 있었다. "내 평생의 직업은 오로지 전도하는 농 부"라는 말씀은 그 어떤 표현보다도 그분의 삶을 잘 요약해 주는 듯 하다.
당시 풀무원 농장은 일체의 화학비료나 제초제를 쓰지 않아 토양이 매우 비옥했다. 하루는 밭에서 감자 수확하는 일을 도왔다. 소가 쟁기로 고랑을 뒤집고 지나가면 희디흰 감자알등이 덩굴째 드러났다. 둥근 감자들을 캐서 바구니에 거두어들이는 재미가 쏠쏠 했다. 흙을 갈아엎는 순간 코끝에 훅 끼쳐 오는 흙냄새. 그 냄새와 감촉에 취해 나는 지렁이들이 꿈틀거리는 흙 위를 맨발로 뛰어다녔다. 어린아이 같은 내 모습을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며 바라보셨다.
소로우의 <윌든>을 보면, 장마로 생겨난 물웅덩이에 발을 첨벙거리를 순간 물속에서 개구리 떼가 일제히 울면서 튀어 오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 소로우는 온몸이 감전된 것 같은 희열을 느꼈다고 말한다. 내가 그런 원초적인 환희와 생명감을 느낀 것은 스무 살 때 풀무원의 향기로운 흙 위에서였다. 내가 고동안 써 온 적지 않은 시들의 뿌리가 그 흙에 젖줄을 대고 있을 것이다.
1980년대는 식량 증산 정책에 따라 화학비료의 사용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1970년대부터 이미 원경선 선생님은 유기농법을 통해 자연과 인간이 공존을 이루는 길을 모색하셨다. 풀무원공동체에서 또 하나 배운 것이 있다면, 더불어 사는 마음이다. 그 당시에는 사유재산 없이 공동체 구성원 전체가 평등하게 모든 일을 의논하고 분담해 나갔다.
이런 미덕들이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은 환상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 아름다운 공동체를 마음의 고향처럼 지닌 채 다시 찾아가지 못한 이유도 그 환상이 깨질까 봐 두려워서인 것 같다. '풀무원'이라는 상표를 보면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 씁쓸해지는 것은 그것이 산업화의 물결 앞에 높인 공동체의 운명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공동체를 처음 일군 한 농부의 빛이 희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원경선 선생님의 인터뷰 기사를 우연히 보았는데, 고령에도 하루 8시간씩 굴착기를 타고 농장 주변의 도랑을 치신다고 한다. 90대의 현역 농부로서 그분이 들려주는 건강의 비결은 유기농 농산물과 거친 음식을 먹으며 베풀고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어떤 말이나 행동보다 정직한 땀 이야말로 세상을 바꾸고 치유하는 힘이하는 것을 온 생애를 통해 보여 주신 아름다운 농부. 이 봄날, 더운 김이 오르는 밭둑에 앉아서 그분의 말씀을 다시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교육과 인성을 위한 교양지 <교육과 사색> 2016년 11월호에서 옮겨 적다.
이 글을 읽고 두 가지에 놀랐다. 나도 수필을 쓰는 사람으로서 간혹은 어디까지 나를 드러낼 것인가를 자주 고민한다. 쓰고 싶어서 썼고, 그 글의 반응이 좋아 우연잖게 등단의 기쁨까지 안겨준 <아버지>라는 글을 쓰면서 이런 나의 고민은 깊어졌다. 평생 아버지를 미워했고, 부끄러워 했으며, 나이들어서는 아버지의 삶에 애잔한 마음이 들어 언제가는 꼭 아버지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글 속에 드러나는 우리 아버지는 양반 아버지만을 기술한 것이고, 실제의 아버지는 내가 쓴 글보다 더 모진 말로, 더 상스러운 욕설로 자라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러나 그 글이 등단의 절차를 거쳐 세상에 드러나고, 남의 시선으로 우리 아버지를 평가한 심사평이 공개되고는 심한 부끄러움에 빠졌다. 나와 우리 가족만이 알고 있던 그런 기억을 이렇게 세상에 내 보내고 되는 것인가. 이제는 애잔해진 우리 아버지의 삶을 두 번 망치게 하는 것은 아닌가.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세상의 손가락질도, 지탄도 일찌감치 잊어버리고 사는 아버지를 이제와서 세상에 드러낸다고 하여 뭘 어쩌자는 말인가. 함께 고통을 겪은 내 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슴 속에 두고 살면 될 것을 굳이 세상에 까발리는 기분이 들었다.
나희덕 이 분은 위의 글에서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 성장기를 보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지금이야 단 한 줄의 글로 요약되지만 그 분이 꿈과 희망을 이야기할 때마다 보육원에서 지내던 그 시절은 얼마나 암담한 시절이었을까. 그 시절을 잘 지내오고, 지금의 이 자리(조선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까지 선 그 용기와 의지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나도 용기를 얻는다. 가슴 속 응어리진 이야기를 세상에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 그 암담함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위안에 대한 용기..... 삶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글만이 남에게도 감동을 준다는 깨달음에 대한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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