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히 물러가지 않을 것 같던 무더위가 잦아든 자리에 갑자기 높아진 하늘을 배경으로 비단실 같은 햇살이 내린다. 아침저녁 바람결엔 어느새 심상함이 묻어나고 콩잎이며 들깻잎엔 진한 향이 배어난다. 자연의 힘은 참 오묘하기도 하지, 하는 생각도 잠시 어느덧 둥글게 차올랐던 추석 달도 서서히 가장자리를 내어 주고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청명한 가을 속을 걷는다.
며칠간 다난했던 귀성길이 떠오른다. 올해도 나는 잘 익어 가는 고향 풍경과 피붙이들의 진한 체취를 만난다는 생각에 출렁이는 마음으로 천 리 길을 달려갔다. 강산이 몇 번이나 바뀌고 그리운 사람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떠나갔으나 고향의 모든 것은 마음 속에 늘 현재형으로 살아 있다. 경상도에서 강원도로, 강원도에서 경기도로 전국을 한 바퀴 돌아오는 강행군이지만 사십여 년 객지 생활에 한 번도 차례상을 비워 본 적 없다.
그 귀성길이 올 추석부터 달라져 버렸다. 그동안 벌초나 성묘는 고향에서 했지만 차례는 경기도 큰형님 댁에 가서 지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그래왔고, 십여 년 전 형과 형수님이 돌아가시자 자연스럽게 종손이 제사를 물려 받아 그렇게 지냈다. 종손인 큰조카는 비슷한 시기에 학교를 다니고 한동네에서 아재, 아재 부르며 자란 또래였지만 지금까지 싸움은 커녕 말다툼 한 번 해 본 적 없는 사이였다. 많이 배우지도 못하고 별 물려받은 것도 없는 처지였으나 그는 나보다 훨씬 철들고 생각도 넓게 쓸 줄 아는 어른 같은 존재였다. 비슷한 처지의 질부도 나이는 많지 않지만 시어른들 잘 모시고 집안 대소사 잘 추스르는 전형적인 종부였다. 천성이 밝고 구김이 없는 그녀는 언제 어디서든 주변을 즐겁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돌아보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생각해보시라. 그 많은 기제사는 물론 서른 명 가까운 피붙이가 몰려와 밤새 북적거니는 명절 때마다 뒤치다꺼리를 해내는 그녀의 모습을. 하지만 그녀는 시집와 삽십 년 넘도록 한 번도 찡그린 기색 없이 그걸 다 받아냈다.
그렇게 종갓집 장독같이 익어 가던 그녀가 하루 아침에 돌아섰다. 올 추석 날 아침 그녀는 차례상까지 잘 물린 자리에서 더 이상은 종부 노릇 못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해 버렸다. 머리를 얻어맞은 듯 처음엔 황당하고 화도 났지만 끝에 남는 감정은 그동안 쌓아 온 공든 탑은 무너뜨리는 안타까움이었다. 하늘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지만 그녀가 그런 말을 하리라곤 생각지 못한 일이어서 상실감은 컸다. 게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엉거주춤 옆에 서 있는 종손의 처지를 생각하면 딱하기가 천 근 이었다. 결국 명절 차례와 기제사를 우리가 모셔 오기로 했다.
다행히 아내는 덤덤하게 상황을 받아들여 주었다. 그동안 질부가 고생스럽게 차린 명절상 앞에서 늘 빚진 기분이었는데 내 손으로 차릴 수 있어 홀가분한 마음도 든단다. 산 사람에게 베푸는 공덕 못지않게 조상에게 베푸는 공덕 또한 반드시 음덕이 되어 돌아온다는 믿음을 아내는 갖고 있었다. "그동안 질부가 누렸던 음덕 이제 좀 나눠 가지면 좋지 뭐"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아내 앞에 나는 토 달지 않았다. '우짜든지 저 마음 오래가야 할 낀데'하고 바랄 뿐.
코흘리개 적부터 나는 명절이나 제사같은 집안 행사를 누구보다 손꼽아 기다렸다. 오랜만에 그리던 피붙이들과 만나 한방에 뒹굴며 나는 사람 냄새가 좋아서였다. 자라면서 나는 '제사란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바치는 의례적 행위라기보다 먼저 간 조상이 살아 있는 자손들을 한자리에 모아 주려는 웅숭깊은 배려'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고향을 뒤로 하고 돌아오니 불현듯 종부가 그립다. 이젠 누가 있어 한 소대나 되는 피붙이 불러 모아 삼 대가 함께 산소를 누리는 장관을 만들어 낼 것이며, 성묘 뒤 식당 하나를 통째로 빌리다시피 하는 잔칫집 분위기를 연출해 줄 것인가. 하지만 나는 종부의 천성을 믿는다. 아니 이 땅의 미풍양속을 지켜 온 수많은 종손, 종부의 인고를 믿는다.
한 집안 챙기느라 지치고 힘들었을 이 땅의 종손, 종부들이여 부디 힘내시라. 그 소중한 헌신으로 명절마다 둥글고 환한 웃음꽃 활찍 피었으면 좋겠다. 지금까지 고생만 한 우리 종부가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 갖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리하여 그녀가 다시 넉넉한 웃음 물고 돌아올 수 있도록 고향 집 대문 활짝 열어 놓고 기다려 볼 참이다.
(2016년 11월 호 좋은 생각에서 고증식(시인)님의 글을 옮겨 적다)
(8.30. 순천만)
빨간 색으로 쓴 부분에 특히 공감이 가서 옮겨적었다.
나는 우리 시어머니가 42살에(내가 42살이 되어서 생각해보니 이건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낳은 늦둥이 막내아들한테 시집을 갔다.
내가 큰 딸이니 남편이라도 좀 책임이 적은 자리여서 좋다....그런 생각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실제로 결혼 초에는 친정으로는
대학 다니는 친정 동생의 납부금,
입학 선물로 노트북,
동생 아팠을 때 병원비 등으로 끊임없이 돈이 들어가는 데 비해,
시댁에는 명절 두 번에 용돈으로 드리는 20만원이 전부여서 쫌 미안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17년 전부터 종부 역할을 맡게 되었다.
시숙님 살아 계실 때는 집안에 제사는 하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자식없이 돌아가신 먼 친척 뻘의 <임자없는 할아버지 제사>를 물려받았다.
물론 기분좋게.
그런데 더이상 기력 없어진 86세 된 시어머니 우리 집을 오셔서 7년 살다 가셨고,
이제는 시아버지, 시어머니 제사에
기존에 모시던 임자없는 할아버지 제사,
두 번의 명절이면 조카까지 모이는 대가족 상차림에
4년에 한 번씩 산소가서 지내는 시제까지 모시게 되었다.
임자없는 할아버지 제사를 모시지 않을까 생각도 해 보았으나
모르면 모를까 알고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세상사는 이치는 돌아가신 이에게도 통하는 것일진데
내 입장에서의 이기적인 행동이라는 생각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제사도 결국엔 내 마음 편하자고 지내는 일인진대
내 몸이 편한 대신 내 마음이 불편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약식이나마 꼬박꼬박 흉내는 내는 편이다.
(시누이, 그리고 친정 엄마가 많이 도와주시기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이 고증식님이 쓴 글 속의 생각이다.
'돌아가신 분의 음덕을 내가 못 받으면 내 자식이라도 받겠지'
'제사는 돌아가신 분이 그 분들의 후손을 한 자리에 모이게 하는 자리'
'그래봤자 일 년에 몇 번 안되는 일. 내 한 몸 조금 힘들면 여러 사람이 행복하겠지'
라는 생각......
내 마음 끌리는 대로 살면 되는 일.
너무 계산하지도 재지도 말고, 남에게 피해 안주면서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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