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섬기고 사랑하라!
- 옥룡초등학교 교장 이재민 -
인생은 만남이라고 한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길이 사뭇 달라지기 때문이다. 세상에 눈뜨면서 만나게 되는 부모와의 만남, 마음 맞는 친구와의 만남, 인생의 멘토가 되는 스승과의 만남, 좋은 책과의 만남 등 산다는 건 어쩌면 수없이 많은 만남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학생은 훌륭한 스승을 만남으로써 실력을 쌓게 되고, 교사는 올바른 제자를 만나야 가르치는 보람을 느끼게 된다. 크든 작든 인생의 변화는 만남을 통해 결정하게 된다.
전남 교육계에서 학교의 최고 관리자, 즉 교장이 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길로 2급 정교사로 초임발령 받은 후 이십여 년 이상을 한결 같이 교사의 길을 걸어서 교감, 그리고 교장 발령을 받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공모교장’이다. 공모교장에도 3가지 방법이 있다. 초빙형과 개방형은 교장자격증 소지자라야 공모가 가능한 형이고 나머지 한 가지는 교장 자격증이 없어도 교장이 될 수 있는데, 이를 ‘내부형 공모교장’이라고 한다. 내부형 공모교장은 학교운영회를 비롯한 학교구성원의 승인을 받기도 어렵지만, 지역교육청, 도교육청의 승인을 받아야 하기에 웬만한 인품과 덕성으로는 도전하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전남의 초등교단에서는 딱 한 분이 있는데 그가 바로 백운산 자락에 위치한 옥룡초등학교 교장 이재민 선생이다.
선생을 만난 날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하순경이었다. 선생은 그 더운 날, 새로 부임하는 목사님을 맞이하고자 교인들과 교회 안팎을 청소하는 일로 구슬땀을 흘리는 중이셨다. 1978년 10여 명의 성도와 함께 교회 설립 때부터 함께 해 온 옥룡 추산교회에서였다. 선생을 비롯한 성도들이 직접 황토벽돌 3천장을 찍어 완성하였다는 교회 2층에서 그가 지나온 교직인생 사십 년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동화 속 산골마을에서의 행복한 교직 시작
선생은 1974년 2월에 광주교육대학을 졸업하였다. 선생이 졸업하던 당시는 발령이 졸업하는 해에 나는 경우가 드물었다. 2~3년 기다린 것은 보통이고, 많게는 5년을 넘게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다. 교육대학 정문 앞에서 엿을 파는 졸업생도 있었고, 세탁소를 운영하거나 막노동판에서 뒤는 등 생활전선에 뛰어드는 일이 다반사였다. 성적이 좋았던 선생은 1975년 6월 15일자로 곡성군 입면 동산초등학교로 첫발령을 받게 된다. 첫돌, 첫아이, 첫사랑...처음이 주는 설레임과 신선함은 선생도 예외가 아니었나 보다. 40년 교직인생 중 첫발령 제자였던 그 아이들이 가장 생각난다는 선생은 “당시 관사에서 살았지요. 지금도 되돌아보면 동화속 같은 시골 아이들과 살아낸 일 년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곡성의 페스탈로찌’라고 불리우던 김명수 선생님을 만나 교직의 길을 함께 고민하였던 시절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선생은 교직입문 일 년만에 고향인 옥룡북초등학교로 발령을 받게 된다. 아이들과 헤어지는 마지막 날까지도 밤에 모여 별자리 공부를 하였단다. “이튿날 눈이 퉁퉁 부은 채 버스로 오는 면사무소까지 4km를 전체 아이들과 함께 걸었습니다. 사진관으로 가서 아이들과 사진 한 장을 찍고 헤어졌지요. 함께 뒹굴고 생활하던 그 아이들을 1980년대에 서울서 만났습니다. 18명이 나왔더군요. 그 수는 그 당시 학생들의 2/3에 해당하는 수였지요. 그 아이들과의 만남은 성년이 될 때까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오래 전 그날, 감동으로 물들었을 스승과 제자의 만남을 그려본다. 돈도, 명예도 따르지 않지만 사람을 길러내는 일, 선생은 많지만 스승은 없다는 자괴감 섞인 목소리가 높아가는 오늘이기에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지금은 폐교가 되고 없는 전라도 산골 그 작은 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로 이어진 인연이 서울까지 연결이 되었던 그 날의 감동이 필자에게도 느껴지는 듯하다.
실력보다는 인맥과 조건이 우선시되는 승진의 길 포기,
평교사로 아이들과 함께 뒹굴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교육 실천
선생은 광양 옥룡사람이다. 할아버지가 서당훈장이셔서 어려서부터 전통적 유교정신과 선비정신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았다. 가세가 기울면서 경제적 어려움으로 간 교육대학이었지만 가르침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초임지 곡성을 떠나 모교인 옥룡북초등학교로 옮긴 선생은 교육부 지정 저축교육시범학교에서 열심히 일한 공로를 인정받아 교직경력 2년 만에 문교부장관상을 받게 된다. 이쯤 되면 보통의 사람들은 승진을 꿈꾸는 게 당연한 일 일터다. 그러나 선생은 승진하는 데 필요한 보고서가 대필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실력보다는 인맥이나 다른 조건이 더 우선시되는 당시의 교육환경을 보고 승진의 길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선생은 “이건 제 길이 아니다 생각했습니다. 교직에 발 디디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육하는 일인 만큼 정정당당하게 바른 질서에 의해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보다 일찍 길이 열렸지만 제 교육철학에 비추어 쉽고 편하게 그 길로 발을 담그기는 어려웠습니다.”라는 말한다.
그렇다면 나의 길은 무엇인가? 아이들에게 집중하는 것에서 답을 찾은 선생은 쉰 중반까지 아이들과 함께 뒹굴고 공차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교육을 실천한다. 그러면서 한 편으로는 마음 맞는 교사들과 함께 ‘본질에 충실한 교육이 무엇인가? 참된 교사가 무엇인가? 우리 학교가 어떻게 변해야 하는가?’를 고민한다. 교육부조리를 없애기 위해 투쟁하고 앞장서기 보다는 끊임없이 고민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가를 질문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여 왔다.
“세상 모든 일이 100% 옳고, 100% 틀린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름대로의 판단과 삶의 방식을 존중해야지요. 최선의 길이 무엇인가? 이해 속에서 최선의 길을 모색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교육현장에서 잘못되고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좋게 변화하도록 노력해 가야지요.” 그런 생각으로 선생은 1987년 9월 「광주, 전남 교사협의회」 , 그 해 12월 중등교사를 중심으로 한 「광양교사협의회」를 조직하게 된다. 또 2009년부터 「행복한 학교를 꿈꾸는 세상」의 회원이 되어 혁신학교에 대한 공부를 하게 되면서 학교현장에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학교상은 무엇일까? 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아이들이 주인이고,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를 만들기 위해
2012년 옥룡초등학교 내부형 공모교장에 도전
이쯤 되면 의문이 생길 것이다. 승진제도에 대한 거부감으로 그 길을 포기한 사람이 뒤늦게 교장의 길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남은 진보교육감의 취임 이후 승진제도의 유연화 측면으로 ‘내부형 교장공모제’를 도입하게 된다. 교육부 안에 따르면 교직경력 15년 이상이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게 되어 있지만 교육부시행령 규정에 의해 ‘내부형 교장공모제’의 길은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기보다 어려운 게 현실이다.
“저는 한 가지만 생각하였습니다. 교장의 지위가 아닌 마음껏 교사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주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학교의 중심에 아이들을 두고, 그 아이들이 주인이고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를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학부모는 조력자, 방관자가 아니고 교사와 함께 참여하고 함께 꿈꾸는 학교의 모습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또 지금까지 이론으로만 공부하던 혁신학교가 현실에서도 가능할까? 길들여진 아이들이 스스로 주인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까? 공부한 내용을 실천해 보고 싶어서 도전을 결심했습니다.”
2012년 9월 옥룡초등학교에 부임한 이후 이제 만 2년이 지났다. 선생의 그런 생각들은 얼마나 실천이 되었을까? 임기 4년 중 이제 막 반환점을 돈 선생의 소감을 들어보자.
“저는 교장의 역할이 아이들에게는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기다려주고 기회는 주는 것,교사가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2년간 저는 누구보다 일찍 학교에 갔습니다. 등굣길을 청소하고, 아이들과 선생님을 반갑게 맞아들였습니다. 아이들을 섬기는 교장이 되고 싶었습니다. 믿음을 주고 기회를 주고 고민하면서 길을 찾게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변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서서히 변하였지요. 달려와서 품에 안기고, 고민을 상담하고, 아이들과 거리감없이 지낼 수 있게 되어 행복합니다.”
모두가 주인이 되는 학교, 교사도 아이들도 행복한 학교를 만드는 건 학교 구성원 모두의 바램이다. 그럼에도 이상과 현실은 엄연히 차이가 나는 법, 갈등은 없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고유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가치는 각기 다르지요. 그걸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청소하시는 분은 청소의 역할을 할 뿐이고, 저는 교장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누구든지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고 대우해주면 자신이 가진 역량을 드러냅니다. 그런 분위기가 학교에 퍼지면 좋은 관계가 형성되고, 결국에는 바람직한 학교문화가 정립하게 되는 것이지요.”
지금 현재 내가 있는 위치에서 쓰임 받을 수 있기에 행복
고향과 자연 속에서 필요한 일을 하며 살고 싶어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 그래서 갈등도 이해로 풀어가는 것. 인생지침서나 처세서에 흔하게 등장하는 말이면서도 실천하고 살기는 참 어려운 것이 이 말이다. 학교를 통할하는 관리자로서, 아이들의 자상한 스승으로서 인생2막을 새롭게 시작하는 선생의 남은 소망은 무엇일까?
“저는 큰 꿈이나 욕심은 없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유교가정에서 자라서 남에게 해되는 일은 하지 말라는 가풍 속에서 자랐습니다. 대학시절 신앙을 가지면서 나라는 존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필요로 하는 곳에 쓰임을 받는 것이 최고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지금 현재 내가 있는 위치에서 쓰임 받을 수 있기에 저는 지금 행복합니다. 남은 삶도 고향과 자연 속에서 필요한 일을 하고 살 수 있었으면 더 좋겠습니다.”
필자는 선생과 공통점이 많다. 광양이 고향이고, 같은 교육대학을 나온데다 광양에서 오래 교직생활을 했다. 선생이 광양에서 근무한 기간은 16년, 필자는 그보다 더 많은 17년을 광양에서 근무했다. 허나 아쉽게도 선생과 내가 한 학교에서 근무하는 행운을 누리지는 못했다. 아쉽다. 햇병아리 교사 시절 선생을 만났더라면 교직성장에 좀 더 발전이 되지 않았을까? 아이들을 좀 더 사랑하고 섬기는 교사가 되지 않았을까? 인생은 만남이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의 갈림길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많이 달라지게 된다. 같이 근무하는 행운을 누리지는 못했지만 선생의 가르침을 내 남은 교직생활에서 실천해 보고 싶다.
사람에게서 향기가 난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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