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5월 14일(일)
대마도 여행 2일째
새로 신축한 호텔에서 간편식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오전 8시 30분 집결지인 다리 위에서 만났다. 오늘은 여정의 대부분이 도보로 이루어진다. 날씨가 너무 좋아선지 햇살이 따갑다. 호텔에서 짐 정리를 하면서 아무리 찾아도 모자가 보이지 않았다. 지난번 서울 갔을 때 딸래미가 잘 어울린다고 사라고 하여서 산 흰색 모자가 딱 한 번 밖에 쓰지 못했는데 사라져 버렸다. 차 안에 둔 듯 하여 오전 10시 30분에 차를 탈 때 보았으나 없었다. 문제는 어디서 잃어버렸는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 갈수록 심해져가는 이 건망증은 어이할꼬? 결국 화장실 다녀오라고 준 짧은 20분을 쇼핑몰에 가서 모자 사는 데 다 썼다. 세금 7%를 포함하여 4만원이 넘는 모자를 샀다. ㅠㅠ
산 색깔이 너무 이쁘다. 이양하의 <신록예찬>이 저절로 떠오른다. 짧은 필설로 저 아름다움을 찬양할 길 없어 이양하님의 글을 잠깐 빌려와 보았다. 그러고보면 미술 시간에 산 하면 초록을 칠하는 건 저 아름다운 신록에 대한 모독이 될 것이다. 때로는 노랗고, 때로는 연두로, 또 초록으로 빛나는 저 산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고 먼 산을 바라보라. 어린애의 웃음같이 깨끗하고 명랑한 5월의 하늘, 나날이 푸르러 가는 이 산 저 산, 나날이 새로운 경이를 가져오는 이 언덕 저 언덕, 그리고 하늘을 달리고 녹음을 스쳐 오는 맑고 향기로운 바람― 우리가 비록 빈한하여 가진 것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러한 때 모든 것을 가진 듯하고, 우리의 마음이 비록 가난하여 바라는 바, 기대하는 바가 없다 할지라도, 하늘을 달리어 녹음을 스쳐 오는 바람은 다음 순간에라도 곧 모든 것을 가져올 듯하지 아니한가?
맨 처음 간 곳은 첫번째 사진에 보이는 조선통신사비가 있는 곳이다. 조선의 앞선 문물을 전해주기 위해 일본 본토로 가기 전 처음 들른 곳이 바로 이곳 대마도란다. 사신단이 머물 때면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어 사신단을 환영하고 그걸 기념하기 위해 저런 비도 세워 두었다 한다.
그리고 바로 위 사진은 덕혜옹주 결혼 봉축비이다. 구한말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듯 조선도 아니고 <이왕가>라고 표시되어 있다. 나라 잃은 백성의 애환이 보이는 듯 하다.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과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고종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하지만 아버지 고종이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부터 공포에 휩싸여 살았으며 신식 여성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간 뒤에는 우울증에 고독감까지 겹쳐 실어증에 걸렸다. 말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창덕궁 낙선재에 안주하다가, 1989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한국사 인물열전)
가이드가 가지고 온 사진을 찍었다. 8살 때의 눈빛이 또렷하고 어여쁜 덕헤옹주.
결혼식 때 모습. 전해지기로는 이때도 이미 정신병이 시작되었을 때라고 한다. 어린 시절에 비해 눈빛이 생기를 잃었다. 얼마전 손예진이 열연한 영화 <덕혜옹주>는 보지 못했지만 오래전 권비영 소설가가 쓴 <덕혜옹주>는 읽었었는데도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금 느낀다. 지금 내가 시간 내서 하는 이 블러그도 먼 훗날 오늘처럼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 데는 유용하리라....그렇게 위안을 삼아본다.
여긴 가네이시 성터이다. 덕혜옹주 결혼봉축기념비와 연결되어 있다. 성터가 있던 자리를 일부만 복원해 놓은 거라고 했다.
다시 또 십여 분을 걸어서 일본의 절 수선사에 왔다. 작은 절이었다. 안에서는 돌아가신 이를 위한 추도식이 열리고 있었다. 조용히 한다고는 했지만 우리가 방해하고 있는 건 분명했다. 이 작은 절을 들어온 이유는 바로 옆에 최익현 선생의 비석이 있어서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고 망국조약에 참여한 외부대신 박제순 등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했다. 〈포고팔도사민〉을 각지에 보내 우리 민족이 당당한 자주민임을 밝히고, 국권회복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1895년 8월 민비학살사건이(을미사변) 일어나고, 11월에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지자 포천군 내의 양반들을 모아 국모(國母)의 원수를 갚고 단발령에 반대할 것을 꾀했다. 1906년 수백 명의 유림을 모아 의병을 모집했으나 곧 잡혀 쓰시마섬으로 유배되었고, 병을 얻어 순국했다.(다음 백과사전)
수선사 한 쪽에는 이렇게 가족납골묘가 있었다. 일본은 화장한 후 큰 뼈만 추려서 가족 납골묘에 보관한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멀리 있지 않고 같은 곳에 있음을 이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여기 모신 이들의 편안한 안식을 기원한다.
수선사 입구
이즈하라에서 주로 모일 때 만났던 다리 위에서 한 컷. 이즈하라를 가로지르는 다리인데 강물이 아니라 바닷물이다. 아침에는 물이 밀물이었는데 점심을 먹고 오니 썰물....크고 작은 복어들이 유유자적하게 떠다니더라. 이 바닷물은 우리가 배를 타는 이즈하라항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는 이즈하라항이 한 눈에 들어오는 카미자카 전망대에서 걸어 내려오는 길이다. 옅은 안개에 싸인 듯 전체 조망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대신 이 숲은 참 맘에 들었다. 원시림처럼 우거진 숲. 대마도의 96%이상이 산으로 둘러싸인 탓인지 공기는 정말 좋았다. 요 며칠 새 미세먼지 주의보가 내려지지 않은 날이 찾기 힘들 정도로 한국의 공기상태는 나빴는데 이곳은 청명하고 좋았다. 우거진 나무, 상쾌한 공기가 대마도에서 가장 부러운 일이었다.
언제나 일본 오면 느끼는 거지만 나라는 부자지만 국민은 가난한 일본과(가난하다기 보다는 검소하다고 말해야 하겠지? 해마다 저축 많이 하기로 소문난 일본이니까...) 나라는 가난하지만 국민들 입고 쓰는 건 부자인 대한민국이 많이 비교가 된다. 작은 차, 작은 집, 소박한 정원...한국의 평화로운 시골길을 걷는 듯 여유있는 여행이었다.
돌아올 때는 2시간 반이 걸렸다. 한국을 한 시간쯤 남겨두고는 배가 이리저리 흔들리더니 멀미가 나기 시작했다. 800명 정원의 오션플라워 2호는 거의 만석이었다. 산악회에서 온 단체 등산객이 많은 탓인지 내릴 때보니 얼큰하게 취한 승객들이 많았다.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는 헤프닝을 벌이는 사람도 있었다. 예전에는 꼴불견 한국인이라고 흉본게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열심히 일하고 잠시 마음 맞는 사람들과 놀러왔으리라. 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시간을 가진 나라 한국 사람들은 놀기도 잘 하고 일할때는 또 끝내주게 열심히 일한다. 어떤 이는 아무 생각없이 티비 보는 걸로 피곤을 풀고, 어떤 이는 음악을 듣는 걸로, 혹은 독서 하는 걸로 푸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마음 맞는 사람들과 벼르던 해외여행으로(그곳이 아무리 가깝다고 해도 해외는 해외라서 마음을 크게 내야 되겠지?) 푸는 사람도 분명 있을 테니까....나이 먹는 건 그래서 그리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이렇게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도 하니까.....
대마도의 공기와 울창한 삼림을 한국으로 가져오고 싶은 2017년 봄 대마도 여행. 술에 취해버린 남자들 넷을 대신하여 순천까지 운전하고 오는 길이 피곤하긴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밤 9시 조금 넘어 도착한 광양의 감자탕 집에서 입에 맞는 한국음식을 배부르게 먹는 언니야들을 보면서 짧지만 만족한 여행이었다고 생각해본다. 벌써부터 다음 여행이 기다려진다. 여행이란 모름지기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쉬운 것임을 너무나 잘 아는지라........ㅋㅋㅋㅋ
201705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