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23 남해금산 보리암의 가족여행
예정에 없이 남해로 가족여행을 떠나게 된 건 큰 딸아이의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
어제 4월 22일은 김씨집안 장손의 결혼식이 있어서 아이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는데...
돌아오는 길 뜬금없이
"엄마, 남해 금산 가 봤어요?
한다.
"당연하지, 왜?"
"거기 보리암이 기도발이 좋다는 말을 들어서요."
짠한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것이 큰 딸은 졸업한 지 꽤 되었는데 몇 년 째 홀로 공부하는 중....
서른 되기 전까지 평생의 직장을 얻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밀어줄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딸아이 뒷바라지 하는 일이야 부모된 도리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기죽어 보이고 인생의 가장 좋은 청춘의 한복판을 어두컴컴한 독서실 한 복판에서
지내고 있는 딸아이를 볼 때마다 안스러워지는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행복을 저당잡히는 삶을 사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생각되지만 별 다른 방법이 없이 또 다시 시험을 준비하는 딸을 보면서...
출발부터 너무나 힘든 <요즘 청춘>들의 고단함이 피부로 느껴진다.
우리때야 대학 졸업장만 있어도 요새 하늘의 별따기라는 공사 정도야 조금의 노력만 있으면
척척 잘도 붙던 시절이었으니....
그런 딸아이의 지나가는 말을 허투로 들을 수가 없어서
일요일 아침 서둘러 모처럼의 가족여행을 떠났다.
아이들 모두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고,
간혹 모이더라도 오면 가기 바빠서 가까운 곳만 갔다가 돌아오곤 했는데
남해는 실은 한 시간 조금 넘는 거리임에도 아이들과는 가 본 적이 없었다.
주차장에 차를 두고 셔틀버스를 타고 금산 중턱까지 간 후
20여분 걸으니 보리암이 나왔다.
셔틀버스비는 왕복 2천원.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어 걷는 건 무리라 생각되었다.
부지런한 산꾼들이 간혹 내려오는 모습은 보였지만.....
이 날은 날씨도 덥고 초파일을 앞 둔 탓인지 단체 관광객이 많았다.
곱게 색색의 연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요새 우리를 많이 괴롭혔던 미세먼지도 이 날은 별로 없어서
시야도 좋았다.
이곳은 우리나라 남동해안의 거제도부터 여수 오동도까지 연결되는 한려해상 국립공원
아니나다를까 바다 너머 수많은 다도해가 보인다.
아름다운 섬, 해안경관, 맑은 바다,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유적지, 난대성 식물상과 다양한 조류가
조화를 이뤄 1968년 우리나라 네 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는 곳.
그 중 남해 금산은 상주 은모래 해변을 안고 있는 상주 금산지구에 속하는 곳이라 한다.
고려 후기 이성계가 이 산에서 100일 기도수에 조선왕조를 개국한 후 그 영험에 보답하기 위해
산 전체를 비단으로 덮었다 해서 비단 錦자를 써서 이름지어진 금산.
보리암은 하동 쌍계사의 말사로 조선 현종 때 보리암이라 명명하고
1969년 증축한 암자이다.
위에 보이는 보리암전 삼층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고 양식 또한 고려초기의 것으로
풍수지리상 나쁜 기운을 억누르고 약한 기운을 보충하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그 날 해설을 담당한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의 말씀에 의하면
이 탑이 있는 곳이 <기도발>이 가장 좋은 곳이라고 한다.
몇 바퀴라고 딱히 정해진 건 없이 마음 우러나는대로 돌면 되는 거라고....
당연하게 우리 가족 모두는 진지하게 탑돌이 모드로....ㅋㅋ
그 유명한 남해 보리암의 해수관음상이다.
양양 낙산사 홍련암, 강화군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 나라 3대 관세음보살 성지로 뽑히는데
1977년 바다를 보며 세워진 상이다.
색색의 연등, 이제 막 돋기 시작한 연초록의 나뭇잎과 함께 어우러진 옆모습이 아름다워 한참을 쳐다보았다.
딸아이의 소망이 이뤄지기를.
영특한 딸아이가 이제 좀 행복해지기를 기도해본다.
남해 금산
이 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물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